고은

고은은 누구인가?

그는 한울님이 운명적으로 내려준 '신의 선물이요 축복'이다.

그 많은 시인들과 알게 되고 사귀는 과정에서 언제나 나의 앞에 '경이'로 나타나는 것이 고은이다.
그에게는 도대체 일체의 인용이 아무런 힘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만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자유이고 그저 자기 자신이다. (리영희)

'속수무책(束手無策)'. 『만인보』를 받아보고 엽서에 써보낸 소리였다. 그냥 법담 가락의 흉내가 아니었다. 『만인보』의 감동이 그의 인간에 대한 기왕의 공감과 겹치며 느낀 심사가 도무지 '속수무책'이었다. 애초에 고은을 겨뤄볼 대상으로 삼아서가 아니라 그의 초인적인 능력과 초인적인 정열과 초인적인 분방과 초인적인 성취에 어지럼증이 느껴질 지경이어서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항상 고은을 멀찍이 건너다보거나 쳐다보고만 있다. 여기 있는가 하면 저기서 웃고 있고, 덩달아 옷고 나면 한참 저기서 목청을 높이고 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면 이미 다른 말이 불을 뿜고 있다. 곁에서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정신이 없다. 말이 급하고 바쁠 때는 토막말로 징검다리만 놓으며 성큼성큼 건너뛰고, 거기다 술이라도 마셨을 때는 숫제 옆구리에 끼고 훨훨 날아간다. 고담준론일 때도 그렇지만, 가벼운 이야기일 때는 더한다. 그럴 때 나는 눈하고 귀는 물론이고 입이며 콧구멍까지 다 열어서 내맡겨놓고 그냥 손 개얹고 앉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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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고은은 상상력도 엄청나지만 시적 식성은 더 무지막지하다. 소는 풀만 먹고 호랑이와 독수리는 짐승만 먹고 불가사리도 쇠붙이만 먹는데, 그는 풀이고 짐승이고 쇠붙이고 돌멩이고 통나무고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고 날아다니며 닥치는대로 먹어치운다 그 잡식성으로 걸터듬은 먹이가 그의 역사적 상상력의 용광로에 들어가면 금반지도 되어 나오고 비단도 되어 나오고 화살도 화염병도 되어 나온다. 길가에 딍구는 조약돌이나 장독대에 구르는 낙엽이야 말할 것도 없고, 길바닥에 동전이라도 하나 떨어졌다 하면 그 임자와 돈의 내력을 좇아 그의 상상력은 구멍가게로 공장으로 임투현장으로 천방지축 앵앵 순식간에 이 땅 구석구석을 종횡으로 몇 바퀴 돌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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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기억력이나 상상력은 타고난 것이라 치더라도, 민족정신을 꿰뚫는 역사의식과 인생에 대한 통찰은 그냥 허두루 향성된 것이 아니다. 그 생애 자체가 끝없는 탐구와 모색과 번민과 모험으로 점철된 한 편의 흥미롭고 처절한 장편이며, 그의 문학과 현실적 행위로의 불 같은 실천은 모두가 생애를 건 엄중한 역사행위이고 그런 태도는 그의 기나긴 인생역정을 통해서 탄탄하게 형성된 것이다. (송기숙)

거의 반세기에 걸친 고은의 기존 작업만으로도 그가 우리 문학사에 우뚝한 존재가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은 그것대로 중요하다. 훌륭한 작품을 풍성한 분량으로 써낸다는 것은 대시인의 필요조건의 하나인데, 그 점에서 고은은 정지용, 백석, 김수영이나 신동엽 같은 애석한 이름들과 구별된다. 아니, 장수와 다작의 시작으로 곧잘 칭송되는 미당 서정주를 쉽게 넘어선다.

근작 '사과꽃'을 예로 보더라도 김수영보다 덜 난해하다 뿐이지 그 사상이나 가락 모두 김수영과 통할지언정 서정주로서는 근접할 수 없는 경지이다. (백낙청)

"운명이라. 선생께서 시방, 감히 운명이란 말을 했습니다. 그것도 사람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시에까지 말입니다. 언젠가 선생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지요. 백년에 한 번 날까말까한 우리 시대의 시인 고은 일초(一超. 고은의 승려시절 법명)라고. 요컨대 사람과 그의 시가 동시에 운명스러움이란 듯이 말입니다. 일초를 두고 '우리 시대'의 시인이라 했을 때 선생 손에 『만인보』가 들려 있었음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합니다. 그때 선생의 눈빛에서 제가 느낀 것은 이는 운명이 아니라 필연이다, 라는 단호함이었지요." (김윤식)

흔히 고은의 문학을 큰 산에 비유한다. 옳은 말이다. 시만 보아도 그러해서 가령 그의 시를 읽는 맛은 큰 산을 더듬는 것 같다는 표현보다 더 적절한 말도 드물리라. 그의 시는 높은 산봉우리인가 하면 문득 깊은 골짜기다. 가파른 벼랑이 되어 가까이 오는 것을 밀어내다가도 밋밋한 산비알이 되어 오는 사람을 따스하게 감싸안는다. 때로는 바위로 곧추서서 하늘을 향해 칼질을 하지만, 또 때로는 산자락에 질펀하게 누워 온갖 게으름을 피우는 재미도 놓치지 않는다.

어깨와 겨드랑이에는 호랑이와 늑대 따위 맹수를 기르면서도 사타구니와 발치에는 잡벌레가 들끓게 내버려둔다. 어떤 곳은 대낮같이 밝고 또 어떤 곳은 밤중처럼 어둡다. 이쪽에서 아름답고 화려한 꽃들이 잔뜩 피어 가지껏 뽐내고 있는가 하면 저쪽에서는 못나고 보잘것없는 잡풀들이 고개를 꼬고 엎드려 있다. 말하자면 이것이 고은의 시다. 그러나 큰 산에 비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일초의 시는 크기도 하거니와 빠르기 때문이다. 사슴처럼 날렵하고 발빠른 점이 고은 시의 또하나의 미덕이기도 하다.

고은의 시는 한 곳에 못박혀 있지 않다. 어느 외진 시골마을에서 농사꾼의 벗이 되어 서성거리고 있는가 하면, 공장지대 한복판에 뛰어들어 노동자의 대열에 서서 어깨동무하고 내달린다. 질척거리는 뒷골목에서 술취한 부랑자와 동무하고 있다가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종소리가 되어 울려퍼진다. 큰 배의 우렁찬 기적소리가 되어 억센 파도를 넘어가기도 하고, 협귀열차의 삐걱거리는 바퀴소리가 되어 쓸쓸히 산모롱이를 돌기도 한다. 바다에 가 있는가 싶으면 산에 가 있고, 산에 가 있는가 싶으면 장바닥에 가 있다. 주막에 한가롭게 누워있는 것 같다가도 느닷없이 길거리를 내달리고, 땅바닥을 어슬렁거리다가도 훨훨 높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고은의 시를 정확히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체로 크고 깊은 산 어느 한구석을 더듬었을 뿐일 터이리라. 더욱이, 이것이 고은의 시다 싶을 때는 그는 훌쩍 날아 먼곳으로 달아나 있을 때다. 다시 땀을 뻘뻘 흘리며 쫓아가 겨우 옷깃을 잡으면 그는 어느새 빠져나가 더 멀리 달아난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는다. 뒤돌아보지도 않고 곱새기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의 시의 발자국은 너무 넓고 너무 길다. 놀라운 것은 이것이 바로 그의 삶의 궤적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의 시가 이토록 크고 넓고 깊은 것은 그가 그만큼 크고 넓고 깊은 삶을 산데 연유한다는 얘기다. 다 아는 터이지만 그는 가장 치열한 삶을 살았다. 군사독재와의 싸움에서도 또 통일운동, 변혁운동에서도 그는 한번도 뒤에 선 일이 없다. 그러나 이것만이 그의 삶의 전부는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그는 결코 한 곳에 못박혀 사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저 앞을 가고 있구나 싶어 쫓아가보며 어느새 저만큼 성큼성큼 앞질러 달려가고, 그래서 다시 헐레벌떡 쫓아가면 시치미를 떼고 우두커니 서서 짐짓 딴전을 피우기도 하는 것이 고은이었다. 한편 그의 시가 사슴처럼 빠른 것은 그가 세상의 낡은 관념에 빠져 있기를 늘 거부하는 데서 오는, 그가 지금까지 해온 일에 대해서 세상이 그에게 준 명예와 안락까지 거부하고 있는 데서 오는 것이라는 점도 허투루 보아서는 안될 터이다.

고은은 물론 시인이다. 그것도 큰 시인이다. 그러나 시인이라는 범주만 가지고는 그의 문학을 다 말하지 못한다. 시에 맞먹을 만큼의 많은 소설, 평론, 에쎄이 등의 산문을 썼기 때문이다. 어쩌면 장르라는 개념이 그에게는 무의미했는지 모른다. 그의 거칠 것 없고 거리낌 없는 발걸음이 장르의 벽 따위 쉽사리 넘나들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소설, 평론, 에쎄이가 시인의 여기(餘技)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각각 일가를 이룬 이의 그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그의 소설이나 평론을 읽고 시에서보다 더 깊은 감동을 받았다거나 더 크게 고무되었다는 고백은 독자들한테서 흔히 듣는 터... 그의 문학이 우리 문학이 도달한 가장 높은 봉오리의 하나임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신경림)

그의 질병, 그의 오만, 그의 허장성세, 그의 급격한 말투, 그의 신비스런, 그렇지만 약간은 거칠은 웃음, 그런 것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과 같이 원고지 앞에서 그를 생각할 때에는, 그는 그의 판독하기 어려운 가면 뒤로 숨어버린다.

그의 가면은 일상성 위에 세워져 있다. 그 가면 뒤에서 그는 그의 두 손과 가슴을 지극히 난해한 상형문자로 양각(陽刻)해 놓고 있다. 그 양각된 선과 홈 사이에 얼마나 많은 그의 미지(未知)가 숨어 있는 것일까? 나는 때때로 피곤한 눈을 달래며, 그의 가면의 양각이 조선창호지 위에 찍어 놓은 상징적인 묵화를 바라본다.

비범한 공장(工匠)이 빚어놓은 단순한 도기(陶器)의 심적표출(心的表出)을 나는 거기서 알아낸다. 그의 모든 것은 조선창호지의 시컴한 기호 뭉텅이 속으로 사라진다. 그 기호 속에서 나는 며칠을 허우적거리는 것이지만, 그 허우적거림 속에서 내가 붙잡은 것은 그의 가면(假面)이 아니라, 그 가면의 양각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허무감이다.

자신의 감정을 기묘한 손길로 빚어놓은 그의 솜씨 때문에 그 빚어진 돌출부분이 종이 위에 찍어놓은 신비감 때문에 나는 허무감을 느낀다.

아마 그러할 것이다. 그가 고은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그의 현존(現存)의 흔적 때문이 아니라, 그가 고은이라는 가면 아래 양각하고 있는 모든 것의 형태와 전설 때문이다. (김현)

자 그렇다면 이 '고은 현상'은 어찌된 셈이냐. 그가 세상일 내몰라라하고 죽자고 시만 쓰는 시인이 아니라 누구 못지않게 민주화운동에 앞장서 온 투사라는 사실이 정말 불가해하다면 불가해하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알지만 그는 이 두가지 일만 하는 게 아니라 빈도와 강도 모두 줄기는 했으되 때때로 좋아하는 친구와 후배를 만나서 정신없이 술에 취해 아직도 약간의 광분을 한다. 실로 절간에 '큰스님'이라는 말도 있듯이 그는 서정주도 김수영도 되어보지 못한 우리 문단 최초의 '큰시인'이다.

오늘 그의 시가 이르러 있는 높이와 넓이를 만만하게 가늠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그의 시집 어디를 펼치더라도 거기 살아 숨쉬는 우리말을 만난다는 사실이다. 문학이 되기 위해서 또는 사상이 되기 위해서 재주부리고 용쓰는 언어가 아니라 무심하게 놓여나 있으되 자연과 인생의 구체적인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러한 말, 시가 곧 말이요, 삶임을 실감하게 하는 그러한 말이 그의 시집 어디에나 널려 있다. (염무웅)

고은은 내게 여러 얼굴로 다가온다. 내가 그를 알기 전의 삭발한, 상상컨대 동승처럼 맑으면서도 처연한 빛을 부끄럽게 숨겼을 얼굴, 환속한 이후의 그 달랠 길없는 허무에의 정열로 술좌석을 헤질러놓고 옆사람을 껴안기도 하며 발로 걷어차기도 하는 질풍시대의 얼굴, 저 춥고도 살벌했던 시절 박태순, 이문구와 함께 김지하를 구명하기 위해 이리저리 헤쳐다니며 때로 잡혀가기도 하면서 그 스스로를 엄숙한 표정으로 담금질하던 얼굴, 그리고 드디어는 민중들의 모임의 단상에서, 혹은 젊은 목숨을 버린 민중의 제단 위에서 결렬한 질타와 우렁찬 호곡처럼 울리는 시를 읊는 노도의 얼굴 - 상상으로 그려보고 가까이서 인화하고 혹은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그의 그런 여러 얼굴들은, 실존주의로부터 인문주의, 민주주의, 민중주의로 흘러온 50년대로부터의 급격한 우리 현대사의 표정들을 보여주는 듯 싶다. 선승의 경지에서 투사의 면모로 변해가는 그의 모습들에도, 그러나 어느 때나 한결 같은 모양새라고밖에 할 수 없는, 나로서는 지워지지 않는 고은의 징표가 있다. 그것은 어쩌다 짓는, 자의식이 감긴 수줍은 웃음과, 활달한 손놀림에도 가늘고 긴 그의 손가락들이다. 그 두가지는, 그가 어떤 다른 모습으로 떠올려지든간에, 고은은 순수한 사람이라는 것, 그는 예술가라는 것을 나에게 불변의 진리처럼 확인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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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의 상상력, 세계를 투시하는 예감, 화려하고 유창한 문장……. 이것들이 정말 모두 한 사람에게서 태어날 수 있을까. 그 안에는 여러 개의 귀재가 우글거리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해한 현상이다. (김병익)

파옹(波翁) 고은선생은 바야흐로 문민정부의 기미가 어렴풋할 무렵에 서둘러서 귀거래하여 강호(江湖)의 주인이 되더니, 세상이 이만치에 이르른 오늘날까지 무릇 시옹(詩翁)의 풍도가 어떤 것인가를 몸소 저렇듯이 본보이고 있다.
여전히 양에 덜 찬 것이 있어서 동인지 서인지 모르고 길이나 죄기에 발이 밭은 이라고 할지라도, 파옹이 자적하고 있는 동네를 지나는 길에는 문득 걸음걸이를 삼가고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파옹은 문단의 토우목마(土牛木馬)와 달라서 그 자체가 문화였다. 인류는 문화를 이루어가지만 문화는 인류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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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옹은 정축·무인 연간에 임피(臨陂)·옥구(沃溝)에서 뜨르르했던 5세 신동이었고 '신동이'가 곧 아명이었다. 그리고 그 아명이 관명을 지나 법명을 얻고 문명을 더하다가 마침내 입신의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신동의 신기가 드디어 입신의 경지에 이르면 그에 값하는 별명도 모름지기 신선으로 갈리어 마땅하다 할 것이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파옹은 근본이 다르기에 그게 아닐 수 밖에 없다. 파옹의 근본은 동심이다. 장자방(張子房)이 세상을 조용히 한 뒤에 따라간 상산의 사호(四晧)도 터럭이 희고 얼굴은 동안이었으나 근본은 동심에 있지 않았을 터이니, 파옹은 그냥 안성의 마정리에 있는 숲 속의 한 시옹이란 칭호 위에 그 이상 꾸며서 부를 것이 없는 터수이다.

그렇다면 파옹을 가까이서 본 지가 문예지의 문인 주소록에 주소를 실어온 연조와 비슷한 나에게도 파옹을 대접하여 부르는 사사로운 칭호가 없을 수 있을 것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마디로 일매지어 말하여 파옹의 정체는 집대성(集大成)이다.

파옹의 정체가 집대성이라면 그 집대성을 집에 비유하여 어떤 집인가. 그 집은 문화박물관이다. 설명이 필요한가. 파옹이 생산한 것을 보라. 천고(千古)의 역사가 그 한 몸에 모여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파옹의 소인적(騷人的)인 피부는 차라리 노출된 부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기타는 무엇인가. 진작에 현대의 고전이 된 그의 예술혼을 비롯하여 유생지초(有生之初) 이래, 다시 말하여 인류가 문명을 느끼면서 빚어진 온갖 혼들이 모여 있는 박물관의 지하 창고와 다름없는 것이다. (이문구)

일찍이 발자끄는 빠리의 호적부와 경쟁하겠다고 호언하였다. 그런데 한 시인이 있어 우리 민족의 호적부와 겨루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웠다. 고난으로 축복받은 이 땅에서 살아갔던 평균적 인물들의 눈부신 삶의 자태를 교직한 『만인보』에서 시인은 문득 일천 강물 위에 은빛 도장을 찍는 달빛이 되어 독자들을 저 망망한 민중사의 바다로 인도한다. 소도둑과 형명가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을 백과전서적 전개 속에서 추구하는 『만인보』는 진실로 민족서사시시적 위엄을 스스로 갖추고 있다. (최원식)

고은은 1974년대부터 1980년대의 군부독재 시기를 거쳐 1990년대 전반기까지의 장장 20여 년간에 걸쳐 민주화와 통일운동의 최선봉에 섰던 투사이자, 서정적이며 낭만적이고 사실적이면서도 상징적인 각종 기법으로 가장 많은 양의 작품을 쓴 천재적인 시인이며 소설가요 비평가이자 에세이스트이다. 고은처럼 인간사의 삶을 총체적으로 관조하여 이를 문학예술 전 장르에 걸쳐 다양한 기교와 전위의식을 발휘하여 창작하는 한편 당대적인 역사 현실에 전력을 투신하여 민족과 민중의 이익을 옹호하고자 열정적이며 치열한 활동을 전개하여 그 명성과 영향력을 넓고 깊게 끼친 문학인은 한국 근대문학사상 드물 것이다. 20세기 후반기의 한국적인 기이한 정치적 억압과 냉전체제가 낳은 시대적 총아로서의 면모를 고은은 예술적 형상화로 증언한 위대한 업적을 이룩했다.

이미 고은의 창작은 우선 그 양적인 면에서 세계적인 대문호 괴테나 톨스토이, 위고에 뒤지지 않으며, 역사적인 격변의 현장에 투신한 혁명적 정열에서는 두보나 푸쉬킨 혹은 하이네, 마야코프스키, 브레히트, 그리고 네루다 등등을 능가한다. 그런 한편으로는 유미주의적인 고고성에 대한 탐닉과 예술가적인 기행(奇行)과 괴벽(怪癖)은 비용이나 포우, 보들레르, 와일드와 겨룰만하다. 술로는 이태백을, 여성 편력은 바이런을 능가하거나 필적할만한데다 그 기행(奇行)과 숱한 일화, 시 낭독술 등등 모든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세계문학사에서도 찾기 어려운 기재(奇才)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고은의 전체상을 조망하기에는 문학예술적인 전망대만으로는 어림없다. 이미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한국 근현대의 문학사적 지평의 시계를 벗어나 민족사적 특수성과 세계사적 보편성을 화엄의 변증법으로 승화시켜 사상운동사적 중력권으로 진입해버린 특이한 문호로 격상해 버렸다.

우선 그 이전까지 비교의 잣대로 사용했던 '만해와 고은'이라는 계산자가 부셔져 버린 계기가 이 무렵이었다. 문인에다 독립운동가요 불교 사상가로서의 만해의 존재가 우리 근대사에 우뚝한 것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는 사실인데, 고은은 어느새 이 비색한 세 영역을 확장하여 나름대로의 견고한 미학적 철옹성을 쌓아 어떤 사조적인 공격의 포화도 허물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 무슨 말인고 하니 고은의 문학관은 순수로 뿌리 내려 사회비판 의식으로 가지를 뻗어서는 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아예 어떤 분류도 불가능한 '문학' 그 자체로 열매를 딸 수 있도록 익어 버렸다는 뜻이다.

여기에다 그는 문학 전 장르에 걸쳐 폭발적인 생산량을 과시함으로써 어떤 근면한 평론가도 본격적인 작가론을 쓰기 어려운 영구적인 미개간지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나마도 이제까지 나온 고은론이래야 그의 시에 국한하거나 몇몇 소설과 평론을 인용하는 차원이었는데, 여기에다 70년대 이후의 민주화운동 활동까지를 포함시킨다면 문학사적 전망대만으로는 접근이 어렵게 된다. (임헌영)

문학이 삶 그 자체이고, 삶이 곧 문학일 수 있는 문학인이 얼마나 될까? 이런 질문의 답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시인 고은 선생을 떠올린다. 고은 선생의 문학적 열정과 신념을 나는 도저히 엄두도 낼 수 없고, 그 행동적 지성과 실천을 감히 생각조차 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시인 고은 선생에 대해 마음이 편하다. 고은 선생을 가까이서 만나뵙기 전까지 나는 선생과 같은 달인을 대면했던 적이 없다. 고은 선생을 뵌 뒤부터는 오히려 선생과 같은 시인을 우리 문단에서 앞으로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도 했던 적이 있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고은 선생은 이러한 질문의 상투성과는 애당초 아무 관계없이 문학에 몰두하고 있다. 선생에게는 문학을 한다든지 시를 쓴다든지 하는 말보다는 문학을 살고 있고, 시를 살고 있다는 식의 말이 더욱 잘 어울린다. 문학이라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한다면, 고은 선생의 삶이야말로 가장 문학적이다. 문학적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수사적이라면, 이 말을 달리 바꾸어 지칭할 말을 나는 찾을 수가 없다. 고은 선생이게 있어서 문학은 삶 그 자체라는 말로 바꾼다면, 보다 적절한 표현이 될지 모르지만.

고은 선생은 이미 50년이 되도록 문학을 살아왔고,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포괄할 수 있는 모든 영역의 글쓰기 작업을 진지하게 실천했다. 선생은 어느 한 자리에만 멈추어 서 있었던 적이 없다. 항상 삶의 한복판으로 달리며, 존재의 의미를 일깨우고, 인식의 눈을 깨우친다. 힘차게 달려서 그 존재를 드러내는 고은 선생의 문학은 때로는 매서운 바람 같다. 바람은 자리에 멈추어 서는 순간 그 존재를 잃어버리는 법. 고은 선생의 문학은 바람처럼 휘몰아쳐온 그 역동적인 의미 때문에 더욱 우리의 가슴을 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권영민)

지치지 않고 사막에서조차 시의 불길을 지피는 시인, 그가 고은이다. 도무지 바닥이 없어 보이는 시의 강물이여, 바다여, 장엄하다. 고갈되기를 거부하는 노래의 곳간이여. . . . 폭포가 제 소리를 감추지 않고 태풍이 제 소리의 볼륨을 일부러 낮추지 않듯 고은은 감추지 않는 시인, 감추는 것이 불편한 시인이다. 그는 언제나 자기 시대의 한복판에 서서 시대에 맞서고 시대를 넘어서는 시인이며 그 맞섬과 넘어섬의 방법으로 시대를 ‘위하고자’ 하는 시인이다. 나는 이것이 고은의 시를 고은의 시이게 하는 발성법, 고은이 만든 ‘고은의 시적 전통’이라 생각한다. (도정일)

시의 영역은 화분 몇 개로 아름다운 누구네 안마당 혹은 아파트의 베란다가 아니다. 그것은 바다이고 하늘이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이 산아제한의 시대에, 고은이 자신의 자식으로 품으려는 것은 몇 편의 빼어난 서정시, 몇권의 감동적이 시집이 아니다. 그는 한국어의 총체적인 가능성을 자신의 문학세계로 껴안는다. 말을 아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말을 끊어버린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의 절대적 선지(禪旨)에 맛들었던 그가 아니었던가.

지난 십여년 간 계속되고 있는 고은의 활화산 같은 창조력의 폭발은, 요즘 우리 문학에 하나의 커다란 유행을 이룬, 거칠기 짝이 없는 장광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런 장광설의 설익은 수다가 그냥 배설이라면, 고은의 폭발적 언어는 차라리 역설적으로 말해 우렁찬 침묵이다. 폭포수처럼 솓아지는 그의 시 앞에 편견 걷어내고 사심없이 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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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보』에서 우리는 시를 만들고자 하는 모든 종류의 안달과 조바심을 훌훌 벗어던지고도 정녕 싱싱한 시로 춤추며 살아나오는 해방된 언어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큰 시인이란 다름 아닌 해방된 언어로 시를 쓰는 사람인 것이다. 해방된 언어의 시 곧 언어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한 시는 언어를 붙잡고 이리 만지고 저리 쓰다듬고 얼러보고 꾸짖어 보고 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얼싸안고 있던 언어를 대범하게 슬하에서 독립시켜 놓아주는 과정을 통해 달성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인치고 언어의 연금술사가 아닌 사람은 없지만, 정말로 큰 시인은 언어의 조탁사라는 장인적 경지에 머무르지 않는다. 언어의 기술이 몸에 익고 익어서 평상시의 말이 시가 되는 경지까지 갔다는 최상급의 찬사를 더러 받은 서정주나 기성의 시적 관습의 마당이 너무 편협한 것에 반발하여 언어의 자유를 온몸으로 행사한 김수영에게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해방된 언어들 또는 해방된 언어들만이 훔쳐낼 수 있는 삶의 참모습이 아니라 짐짓 언어로부터 해방된 듯 언어를 마구 부리는 (이것이야말로 언어의 사슬에 기꺼이 탐닉하는 일이다) 자기만족이나 언어의 사슬을 벗어던지겠다는 조바심 혹은 갈망이 반영된 탈출미수의 언어들이었다. 이들의 언어와는 질적으로 다른 참으로 해방된 언어를 만나는 기쁨 - 그것이 『만인보』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눈물겨운 기쁨이다. (김영무)

그는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시인 자신과 작품을 포함한 총체적 의미에서의 '존재'를 다른 장소나 공간으로 이동시키고자 한다. 그곳은 다름아닌 일반성과 상투성, 범속성이 소멸된 세계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를 우리는 일단 '존재의 전이(轉移)'라고 명명해 둔다... 존재의 전이를 지향하는 그의 의지에 찬 노력과 성과는 그와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한국 문단의 그 어떤 누구보다도 단연 독보적이다. (이동순)

시인 고은은 아마도 우리 당대에 가장 이름 붙이기 어려운, 이름 붙일 수 없는, 명명불가한 에너지의 한 현상이다. 60년대 이래 그 밑도 끝도 없는 소문 속의 그는 허무주의의 괴수, 그로테스크한 악마주의자, 연이은 자실미수자, 유미주의자, 환속 승려, 청진동의 음산하고도 현란한 스캔들의 극치, 그런 것 속에서 꽃피어난 귀면(鬼面) 바로 그것이었다. (김승희)

나에게는 어쩐지 그는 시를 뜻으로 쓰지 않고 숨으로 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어느 시를 읽든 호흡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는 시를 쓰기 전에 먼저 읊는 지도 몰랐다. 아니, 그에게서는 시가 씌여지는 것이 아니라 새어나온다고 생각되었다. (황지우)

좀 더 과감하게 단정적으로 말한다면 고은 선생은 시의 영매(靈媒)인 것 같다. 선생은 시의 숨결을 영육(靈肉)으로 호흡한다. 그 호흡을 따라잡지 못하는 내게 그것은 신비스러운 그 무엇이다. 그 호흡이 짙어질 때 선생의 시는 시, 그렇다, 아무런 수식어가 필요없는 시가 된다. (성민엽)

거의 전설적인 시와 삶의 역정을 거쳐 고은은 우리문학사에 우뚝하고 우람한 봉우리로 서 있다. 오늘 당장 '시적 죽음'이 찾아오더라도 이미 그에게 붙여진 '한국현대문학사상 최대의 시인,' '한국 최대의 민족시인,' '비판적 리얼리즘의 최고봉,' 혹은 '하나의 정부 혹은 국가' 라는 등의 꼬리표는 떼어내기 어려우리라. (이경수)

그는 밑 터진 바지 아래로 풋풋한 고추를 내놓고 뛰노는 아이처럼 천의무봉의 순결함으로 무장된,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100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그런 천둥번개같은 목청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무한대의 상상력으로 잠든 사람을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시인이다. 그래서 그는 한울님이 운명적으로 내려준 '신의 선물이요 축복'이다
...
대저 그는 천 년을 산다는 귀목나무처럼 푸를청청하다. 그의 시는 거침이 없고 막힘이 없다. 맺힘이 없다. 강물처럼 도도하게 흐른다. 마치 한강이나 낙동강이나 청천강처럼 유장한 호흡으로 멀리멀리 흘러가지만 둑을 넘치지는 않는다. 쉼 없이 흐르면서도 키울 것들은 다 키운다. 하얀 쌀밥뭉치 같은 숭어도 키우고 귀여운 붕어녀석들도 카우고 있는 것이 그의 시가 허엄쳐 다니는 강물인데 그곳에는 언젠가는 하늘을 날아갈 이무기(용)가 반드시 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넓고 장대하다. (김준태)

고은은 전위, 탐미, 민중, 실험, 서정을 한 몸에 아우르는 세계 유일의 시인이다.

시인의 시와 삶은 놀라움 그 자체다. 우선 문학 생산이라는 면에서 시인을 앞설 자가 없다. 아울러 시인의 숱한 기행과 파격은 문단에 평지돌출하는 화젯거리였다. 시인의 내면엔 천진난만과 광기와 황홀경과 로고스가 함께 소용돌이치는데, 시는 이것의 분출이다.

허무와 퇴폐의 대표자였던 시절부터 고은 문학은 활화산이다. 고은은 끝없이 쓴다. 양적 팽창의 끝간데서 홀연히 질적 전환의 길이 열린다.

몇 잔 술에 눈빛은 생기로 번쩍이고 목소리는 고압의 에너지로 충전되며 영감이 번득이는 말들이 쏟아진다...
시인에게 취중은 선적 직관의 시간이다. 취중방담의 어휘들은 금쪽 같은 수사(修辭)의 날개를 달고 떠다닌다. 과음의 언어들조차 한국어의 섬세하고 순결한 영혼과 잇닿아 있다.
시인은 굳은 것, 낡은 것을 혁파하는 푸릇한 힘으로 늘 역동적이다. 그 역동성이 한국문학의 내연을 깊게 하고 외연을 한껏 키워놓는다.

변방의 문학으로 곤고하던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의 중심으로 견인해가는, 영원한 청년 고은은 우리에게 홀연히 주어진 축복이자 영광이다. (장석주)

고은이 지금까지 보여주고 있는 문학적 성취는 민중, 민족이라는 관형어 없이도 그를 시인으로서 '최고의 경지를 사는 사람'으로 인정할 수 있도록 했다. 그를 중요한 시인으로 언급하게 만든 원동력은 끊임없는 자기변화의 욕망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이었다. (한원균)

고은의 시는 표절할 수 있지만 고은의 생은 표절할 수 없다. 그에 대한 목격담은 왼쪽에 서 보나 가운데서 보나 오른쪽에서 보나 외수없이 '전대미문의 돌발사태'였던 것으로 묘사 된다……
고은의 자취는 신작로도 이정표도 없이 황야를 가로지른 한국의 야성사의 도전과 고독속에 기록되어야 한다. 이미 있었던 길은 혼자 걸어도 수많은 발자국이 동행하지만 길 없 는 광야는 오직 혼자인 자의 그림자밖에는 없다. 시력(시력) 오십년! 그 머나먼 시간 속을 고은은 루소처럼 늘 '체제, 제도와 함께'가 아니라 '홀로' 걸었다. 그러면서 '고독한 산책자 의 몽상'인 듯 그가 저잣거리에 흩뿌려놓은 무수히 많은 축복과 모멸의 시간들은 고스란히 한국 현대시의 나이테가 되었다. (김형수)

고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다. 장르 고은. 고은에게 무엇이라고 묻는 것이야말로 가장 非고은이다. 이 비고은마저 거처할 수 있는 게 장르 고은이다. 대개 시인은 말을 갖지만 고은은 행동자로서 칼을, 세상을 취하게 하는 술을 한 숨결에 품는다. 말·술·칼은 하나다. 이것이 장르 고은, 그뿐. (서해성)

시는 그에게 이 밤과 저 밤을 횡단하며 불빛을 드리우는 어떤 ‘시도’라고 말해도 좋겠다. 그의 시는 꺼질 줄 모르는 사유와 말의 횃불을 들어올려 시대의 구석과 구석을 밝히고, 한걸음 나아가 인간 문명과 역사의 저 어두운 골짜기를 비추려는 ‘의지’라고 불러도 좋겠다…… 그의 시는 자주 빼어난 절창이나 힘찬 가락으로 다가왔고, 간혹 주술과도 같은 면모를 지녀 광(狂)의 술사(述事)가 보내오는 미지의 전언과도 닮았다. (조재룡)

고은은 한국시의 귀신 들씌운 보살이다. 넘치고, 풍부하며, 시적 창조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불교적 인식론자와 열정적인 정치적 자유론자와 박물학자를 결합하는 장대한 시인이다. (알렌 긴즈버그, 미국)

‘알라’ 없는 만달라들의 유일한 친구 고은은 그가 지옥에서 보낸 계절의 심연으로부터 부드러움을 이끌어내려고 한다. (알랭 주프르와, 프랑스)

고은의 시를 읽을 때 그를 안으로 들여와 그의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그의 시들은 생기차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빛으로 가득합니다. 그 현재의 순간으로 깊이 들어가고, 단어 하나하나를 성찰하고, 그리고 시인 고은과 얼굴을 마주하며 만나십시오. (틱낱한, 베트남)

고은은 직관의 가장 높은 봉오리에 도달했다. (로렌스 펠렝게티, 미국)

고은은 한국문화 전체의 중요한 대변자일뿐만 아니라, '지구 행성 유역(流域)'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그 순결함과 그 대담한 명징성과 그 연민의 가슴 때문에 그의 시는 한국의 시만이 아니다. 그의 시는 세계에 속한다. (게리 스나이더, 미국)

고도의 복잡미묘함, 인간적 깊이, 그리고 내적 힘이라는 면에서 고은은 런던이나 서울에 속해 있는 것처럼 뉴욕에도 속해 있다. 그는 많은 세계에 속해 있다. 영적인 세계에도 또한 컴퓨터와 농업과 비행기의 세계에도 속해 있다. 자신의 깊이와 무수한 마음을 고은처럼 명료하게 보여주는 작가는 거의 없다.

시의 세계에서 고은의 시낭독은 독보적이다. 고은처럼 시를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어린시절 모국어인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금지되었으나 끝내 배우고야 말았던 사람의 강렬함을 가지고 자신의 언어를 전달한다.

고은의 시에는 비 온 뒤의 시골길의 진창에 만들어진 바퀴자국 같은 옛스러움이 있다. 하지만 그의 시는 DNA 마이크로칩 같은 오늘날의 최첨단상태도 보여준다. 나는 그의 예술 밑바닥에서 불가사의한 동물과 새의 정령을 느끼며, 동시에 자신의 역사에 밀착한 한 민족의 긴 시간에 걸친 의식(儀式)을 느낀다. (마이클 먹클루어, 미국)

고은의 시들은 놀라운 시들이다. 그것들은 한국의 짧은 이야기들이다 ? 어떤 것들은 비문처럼 간결해서, 리 리버의 아름다운 공동묘지를 상기시킨다. 한국의 그림들이다. 아니, 그보다, 글이니까, 수천 개의 인생을 시 속에 새겨서 보여주는 에크프라시스(그림을 묘사한 글)들이다.

짧은 이야기, 또는 초상화, 그리고 끝을 장식하는 지혜로운 어구들, 라 퐁텐느의 우화가 창작된 시절에 '교훈'이라고 불렀을 결구들. 그의 조국의 사람들이 한 명씩, 열 명씩 (수천 명씩) 나타나서, 이들을 따라 조국의 역사도 함께 그려진다.

내가 여기에 네르발의 이름을 삽입하기 위해 유명한 시구를 약간 변형시키는 것을 용서해준다면, 고은은 아케론강(江)을 열 번이나 승자(勝者)로 건넜다.

그의 사진을 보지 못한 독자를 위해, 고은 시인의 건강하고 마른 실루엣, 젊은 외양, 웃음에서 솟아나오는 에너지, 외부인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강렬한 표현력, 그리고 필자와 마찬가지로 기욤 아폴리네르의, 그 외 온갖 종류의, '알코올'로 신들과 인간들을 위해 잦은 헌주(獻酒)를 즐기는 취향이 있음을 밝힌다. (미셸 드기, 프랑스)

또한 한국의 전후 정치적 사회적 역사의 변화 속에서 거의 10년을 주기로 고은이 자신을 재창조해 오고 있는 그 소리굽쇠(音叉)를 보는 일은 대단히 감명적이다.

고은은, 휘트먼이나 네루다처럼, 민족적 과제에 자기 자신과 자신의 예술적 역정(歷程)을 바치는 일에 전혀 미학적 어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듯 하다.

고은의 경이로운 시인이며, 지난 반세기에 인간의 자유를 쟁취한 영웅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우연히 현대사의 끔찍한 사건들에 휘말린 종교시인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있었던 특별한 사람으로서 인간이 그런 위업을 이룰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로버트 하스, 미국)

고은은 사계절의 시인이다. (클레어 유, 미국)

고은의 시에는 수많은 조성(調聲)과 울림, 기교와 표현, 풍자와 역설, 거대한 비전과 깊이 있는 서정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시인이 있다…… 감히 말하건대, 그의 위대한 문학작품은 물론이고, 고은으로 하여금 전율하고, 감동하게 되는 부분은 바로 그가 위대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나는 시 없는 삶이나 삶이 없는 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은의 삶과 문학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독자들에게도, 다른 작가들에게도 항상 귀중한 본보기가 된다. 고은, 그는 보편적인 시인이며 그 자체로 휴머니즘이라는 보편성을 가진 시인이다. (안또니오 꼴리나스, 스페인)

고은을 따라갈 방법이 없다.
단계적으로 그러나 점점 더 명료하게 부상하면서 인식되고 있는 21세기 한국문학을 위해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룩한 사람은 없다. (데이빗 멕켄, 미국)

고은의 문학적 다산성을 설명하는데는 두 가지가 적절하다. 그가 수많은 작품을 생산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모든 단어 하나하나를 손으로 쓰며 타자기나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다) 수많은 장르를?소설, 에세이, 번역, 희곡, 시 등--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시를 볼 때 그의 작품은 전음계를 넘나든다. 우리의 행성을 에워싸는 바람처럼 그의 글은 거의 모든 유형을 망라한다.

요컨대 고은은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역사의 목격자일뿐만 아니라 배우이다. 그의 시는 그가 사는 시대의 화신(化身)이며, 현대 한국의 억누룰 수 없는 탄성(彈性)의 특징을 갖고 있는 고난과 희망의 표현이다. 그의 힘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바람이 어디에서 오느냐고 묻는 편이 좋을 것이다. 묻고 또 물어라. 그러면 마침내 우리는 스스로 발꿈치에 미풍을 느끼게 될 것이다. (게리 가크, 미국)

고은의 시에서 되풀이되는 모티브는 구름, 강, 깃발, 바람, 그리고 하늘인데, 그런 것들은 매우 독특하고 또한 고도로 추상적인 느낌을 주는 파노라마를, 또한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독창적인 스타일, 일종의 확장된 ‘상징주의’를 만들어내고 있다. 여러 종류의 이런 결합은 절조있고, 정신적이며, 철학적이고, 논쟁적이고, 문체가 있으며--모두 한 점에 수렴된다. 고은에게 범위란 분산이 아니라 통합을 의미한다. 경험에 대한 그의 굶주린 식욕, 경험을 통합하는 신속함, 그의 리듬에 들어있는 과민한 에너지, 이 모든 것은 한 시인을 증명하는 보증서들이다. 그 시인의 특별한 관심은 지나가는 매 순간에 거주하는 것이며 그러면서 그 모든 순간들이 끝없이 서로에게 흘러 드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과 타인들을 함께 거주시킨다. 그것이 바로 그를 그 자신의 존재로 만들며, 또한 아주 표현이 풍부한 세계시민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앤드류 모션, 영국)

고은의 시는 진정 슬픔을 무겁게 지고 있다. 그의 시는 또한 엉뚱한 장난이 넘치고, 다른 사람들을 매서울 정도로 통렬히 기록한다. 그의 시는 씨 주머니처럼 선견지명의 이야기들로 폭발하는데 이야기마다 고은 스스로 극구 찬미하기에 이르는 생명력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때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두 줄로서, 그것은 타인의 삶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가진 사람만이 쓸 수 있다. (배리 힐, 오스트레일리아)

『만인보』에 실린 모든 초상들은 인간의 추상적인 측면이나 일반적인 측면이 아니다. ‘인간 각자의 얼굴, 발, 등’을 얘기하는 벽화들이다. 신비롭고 밝은 기쁨으로 빛나는 지극히 간단하고 명료한 고은의 단어들을 나는 다시 말하겠다. “인간 각자의 얼굴, 발, 등”. 이는 고은의 시집이 제시하는 사실주의적인 유토피아이다. 다시 말해서, 여자 혹은 남자, 아이 혹은 노인, 정상인 혹은 병자, 그리고 부자 보다는 가난한 자, 등등. 이러한 사람들의 무리를 구성하는 각 주체들인 인간을 시적인 조심성으로 감싸 안는 것, 그것이 고은의 시가 제시하는 사실주의적 유토피아이다....불가사의한 기쁨’과 함께, 고은의 시는 덧없는 존재들을, 무명이라 할지라도, 잊을 수 없는 존재들로 만들어 낸다.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서, 눈처럼 녹아내리는 것 그리고 스스로를 멈추지 않고 주는 것, 이것이 바로 『만인보』의 시들이 우리를 위해 녹아내리는 모습이다. (끌로드 무샤르, 프랑스)

고은의 시 때문에 우리의 올 겨울은 따뜻했다. 고은은 슬픔과 단순한 기쁨, 광대한 차원, 우주와의 합일, 시간과의 연속성, 풍부한 과거와 열려 있는 미래를 가진 시인이다. 개인적인 시련은 그를 냉소적인 사람으로 만들지 못했다. 그는 고통으로부터 명백하고도 심오한 지혜를 얻었다. 그의 시를 읽는 일은 그 어떤 철학적 담론보다도 더 보람되다. (딜립 자베리, 인도)

고은의 시는 ‘시 세계’만이 아니라 ‘시 우주’라고 말해도 지나침이 없다… 나는 고은이 그런 경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고은처럼 할 수 있는 시인이라면 커다란 자석과도 같은 하나의 커다란 자성(磁性)의 들판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쇠붙이들은, 그 자력의 들판에 있는 한, 그 크기에 상관없이 그리고 제대로 자리잡고 있는지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든 아니든, 언제나와 같이 남북의 방향으로 배열된다. (방 비에트, 베트남)

고은이 짧고 날카롭고 감각적인 도자기 파편들을 제물처럼 바칠 때 그는 가공하지 않은 하나의 에너지 다발이다. 그 파편들은 만화경 같은 모자이크의 색깔과 그림자로 합체되고 용해된다 (조나단 아미드, 남아프리카공화국)

고은의 시들은 만물의 민주주의 가운데 살며,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도약하는 눈부신 본질을 똑바로 그리고 커다란 기쁨을 가지고 바라본다. (제인 허쉬필드, 미국)

고은의 시에는 보편적이며 초시간적인 특질이 있다. 그는 대단히 아름다운 시들을 썼는데 많은 시편이 자연과 인간의 실존, 죽음과 진리와 시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의 시에는 들리는 눈이 있고 귀 기울이는 혀가 있고 말하는 귀가 있다. 새벽은 물러나는 어둠에 의해 깨어난다. 새벽의 세계는 실로 어둠에 의해 깨어난다. 그의 시의 스타일은 모두 거의 노력하지 않고 애쓰지 않는 듯이 보이며 눈에 보이는 어떤 ‘통일성’ 이 없다. 이것은 그토록 많은 시인들이 오랜 세월의 글쓰기를 통해 얻으려고 그토록 열심히 몸부림쳐온 것이다. (미카엘 오 아호다, 아일랜드)

한국에서 고은은 러시아의 톨스토이 같은 존재이다. 우뚝 솟아 있는 시인인 그는 거대한 아치를 이루는 정치와 굴러가는 역사의 파괴적인 바퀴의 쇠퇴에 붙잡힌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교차하는 부분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방대한 분량의 저서 때문에 그는 한국에서 고은들이라 칭해지기도 하는데, 분명 그의 걸작 『만인보』 하나만을 쓰는 데도 한 일생 이상이 걸릴 것이다. (티샤니 도쉬, 인도)

놀라운 이미지와 시간을 초월한 인물들로 채워진 뛰어난 오디세이 『어린 나그네』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어린 나그네』는 귀중한 발굴품이다…. 고은의 확고한 이 소유물에서 깨달음을 향한 선재동자의 행로의 이야기는 그 경전적 제한으로부터 해방되어 충만한 대낮의 빛이 되고 있다. (프란시스카 조, 미국)

고은은 폭발성과 드라마와 극기적 체념을 합쳐서 엮어놓은 시인이다. 그는 말하기가 신성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의 무대 공연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 무대에서 그의 시는 분명히 발음되지 않는 소리를 동반하며, 그는 종종 시를 생의 찬가처럼 노래한다. (델로, 일간지, 슬로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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