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내 시의행로

"문학의 여러 경계를 허무는 일에도 나는 은연중 익숙하다. 장르 확대와 장르 혼합이라는 문제도 그렇고 리얼리즘과 비리얼리즘의 상호삼투도 그렇다. 이제 내 문학은 변증법적이건 비변증법이건 하나의 용암류와 같은 종합세계와 직관으로서의 세계 또는 인간의 다양한 서사활동으로서의 세계 그리고 한 소년적 서정체계에 걸쳐 있기를 꿈꾼다."

1. 첫 시, <폐결핵>에 대하여

시인의 운명이 시작되었다. 앞으로 몇 십 년이 걸릴지 모를 시적 역정과 함께였다.

1958년 가을, 아직도 총소리와 포소리가 들리는 듯한 휴전 뒤의 남한에서 시인으로 공인되었다. 25세였다.
1930년대 식민지시기 시인 20여 명 이래 시인 1백 명 중의 하나였다.

무엇 하나 가지지 않은 빈손이었다. '빈손인데 호미가 들려 있구나'라는 선가(禪家)의 말은 정작 그 뒤였다.
여벌옷 한 벌밖에 없는 풋풋한 젊은 승려였다. 본디 화가가 될 것을 꿈꾸고 있었는데 전쟁의 소용돌이는 그런 꿈을 없애 주는 대신 몇 편인가 자기 모순과도 같은 시를 습작하게 만드는 음습한 가능성이 있었다.

거듭된 폭격으로 파괴된 고향의 항구는 폐허 그대로 방치된 채였다. 그곳에서 나는 화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화가 나병재와 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에게서 색채와 앙포르멜을 익혔고 그는 나의 비유에 전염되었다.

나는 전쟁의 광기가 휩쓴 뒤의 고향을 떠났다. 좌우익 보복학살의 썩은 사체더미 참변의 현장인 고향은 더 이상 내 호흡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막 발족된 전후 한국시인협회 기관지《현대시》창간호에 신인작품 <폐결핵>이 조지훈의 선정으로 게재되었다. 친구 나병재가 나도 모르게 그 원고를 보냈던 것이다.

그 뒤 나는 산중에서 서울에 갔다. 서울의 비구승단(比丘僧團) 대변인으로서 신문을 창간했다. 서투른 편집으로 지면에 빈칸이 생기기 일쑤였는데, 그 빈칸에 내 시편을 채워 넣기도 했다. 그것이 눈에 띄어 나는 서정주에게 소개되었고 서정주는 내 시 5편 중 3편을 한꺼번에 추천 완료했다.

선적(禪的)인 비서술적 직관의 한 켠, 내 정신의 그늘진 가녘은 병적(病的)이었다. 어린 시절 나 자신이 다치거나 병을 앓는 것에 무척이나 사로잡혔고 심지어 병든 사람 옆에 오래 있는 것을 즐기기도 했다. 공동묘지에 자주 가 있었으며 죽은 어린 아우의 시체를 몰래 빼돌리고 싶기까지 했던 것이다.

병 또는 상처는 마치 인간의 명예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랭보의 한 구절 "계절이여. 성(城)이여. 상처 없는 혼이 어디 있으랴"를 한때 입에 달고 다녔고, 이하(李賀)의 <푸른 피>가 풍기고 있는 병적인 전율에도 사로잡혀 있었다.
소문으로 들은 바 있는 마산 가포리 결핵요양소를 얼마나 갈망했던가. 요양소 병실에서 한밤중 기침소리를 내다가 새벽에는 다른 환자들에게 자신의 기침소리를 인계해 주고 숨지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내 앙상한 가슴 속을 온통 벅차게 만들었다.

나에게는 민법(民法)에서 사회적 불이익을 뜻하는 병의 하나로 규정된 폐결핵이야말로 시적으로 가장 황홀한 것이었다.

그런 나머지 나는 사실이 아닌데도 내가 폐결핵 환자라는 허구를 만들어냈다. 그 허구 속 깊이 들어갔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거짓 사연이 성립된 것이다.

나에게는 순수, 순결 그 자체로 표상되는 누님이 있었다. 그 누님이 내 폐병을 간호하다가 나는 그 병 2기(期)쯤에서 나았고, 누님이 내 병에 전염되어서 끝내 죽었다. 누님의 화장 유골은 내 떠돌이 생활에 동행하다가 서부 다도해 편력시대 밤 뱃길에서 바다 속으로 내던져져 수장(水葬)되었다.

이런 허구를 전후해서 시 <폐결핵>이 나왔던 것이다.

누님이 와서 이마 맡에 앉아 있고
파스 하드라짓드 병 속의 알약들이 누님을 보고 있다.

나는 이 시와 함께 내가 만들어낸 허구에 너무 익숙했으므로 그 허구는 어느새 사실로 굳어져서 아무런 가책도 없게 되었다. 누구에게 지난날을 말할 때는 허구 속의 나를 '고백'했다. 내 문학 멜로드라마는 이렇게 나아가고 있었다.

훨씬 뒤 나는 반독재투쟁의 과정에서 고문과 감옥살이 등으로 몸이 극도로 쇠약했을 때 병원에서 종합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의사는 나에게 엑스레이 필름을 보여주며 언제 폐결핵을 앓았느냐고 물었다. 폐 한쪽은 결핵 3기를 다 마치고 나서 시멘트화된 상태였던 것이다.

나는 놀랍고 또 의아했다. 그때야 허구 속에서 나는 사실의 세계로 건너올 수 있었다.

그 동안 내 폐는 자각증상 없이 저 혼자 결핵을 앓았고, 자연 치유된 것이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내 허구가 이같은 사실이 진행되는 것과 동시에 진행되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감기를 늘 달고 다닌 시절이 있었으나 각혈 따위를 한 적은 전혀 없다. 그동안 내 몸은 세상의 벌판에 내던져진 상태로 방치된 삶에 익숙함으로써 통행금지시대의 술집 탁자 위에서 잠들기도 하고, 두메산골 담장 밑에서 밤을 새기도 했으나 내가 그렇게 가고 싶었던 요양소에는 간 적도 없다.

그런 나에게 허구가 아닌 사실의 폐결핵이 머물다 간 것이다. 남은 수수께끼는 허구로서의 누님이다.
시의 행로 첫머리에 있었던 허구와 있어야 할 허구가 쉽사리 화해하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는다. 아직도 나는 과거의 순정을 수호한다. 왜냐하면 시에 행여나 권위 혹은 과장된 우상이 반영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느 만큼 유치찬란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대 아시아에서는 최상의 교사는 천진난만이라고 했다. 오마르카이얌은 67세에도 마치 소년처럼 천문대가 소원이었다. 현실 이상의 세계와 자아의 합치를 꿈꾸는 일은 일종의 소년혼(少年魂)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아직도 내 시의 길은 삶의 리얼리티에 직결될 필요성과 함께 허구의 미로에 잇대어져 있는지 모른다.

2. 밤과 별

첫 시 <폐결핵> 이전으로 돌아가자. 근원은 더 근원의 근원을 향한다.

1933년 8월 1일 닭띠로 태어났다. 국내의 동갑내기로는 국사학 강만길, 철학 최정호, 언론인 남재희, 이규태, 재야 백기완, 문학평론가 이어령, 출판인 박맹호 등이고, 미국 소설가 수전 손탁, 러시아 시인 예프트쳉코, 독일 예술원장 지에루지 콘란드, 음악가 페테르스키 등이 있다.

내가 태어난 달은 사자좌(獅子座)에 해당한다. 뒷날 고대 천문(天文)의 천변점성술(天變占星術)에 한동안 기울어진 적이 있다. 그래서 일식이나 월식 그리고 혜성과 해와 달의 무리[暈] 그리고, 신성(新星), 유성우(流星雨)와 운석 등 우주의 현상에 대한 관심이 이어졌다.

또한, 지진, 벼락, 홍수, 가뭄 등과 인간의 병, 죽음, 전쟁 그 밖의 변고(變故)들이 모두 하늘의 일과 연결되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천지상관론이며, 그 이론이 무척 신비스럽기도 한 한편 경험적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오래 전부터 말하는 삼재(三災)라는 것도 인간의 운명에 일정한 리듬을 부여하는 재난의 초래였다. 하지만, 내 유년기에는 이런 따위 하늘이나 하늘에 대한 형이상학은 전혀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재난으로서의 일상은 재난에 특별한 의미를 둘 수 없게 했다.

내 기억 속의 첫 하늘은 다섯 살 무렵이었다. 저녁 낙조의 너무나 커다란 하늘 전체가 불이 난 것처럼 새빨간 빛깔로 되었으므로 나는 무서워서 엉엉 울었다.

증조할아버지는 갑오농민전쟁에 멋모르고 동원되었다가 돌아와 죽었고, 할아버지는 술주정뱅이였는데, 아버지가 사 온 술을 어린 손자인 나를 데리고 대작하기도 했다. 끝내 할아버지는 만취한 상태로 소리를 질러가며, 집에 돌아오는 길에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집은 식민지 후기의 모든 한국농민의 보편적인 궁핍 그대로였다. 소가 두 마리였다가 한 마리로 줄었고, 뒤에는 그것도 도둑맞아 외양간이 비었다. 내일도 오늘과 다른 바 없는 굶주림에 대한 공포의 미래였다. 가난은 사람들에게 말을 없애 준다. 또한, 가난은 말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밥을 먹은 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움직이지 못하게 타이른다. 먹은 밥이 빨리 꺼지면 빨리 배가 고프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한국농촌의 수확물을 전부 착취했다. 첫 여름의 보리가 나오기까지 몇 개월을 먹다가 굶다가 해야 했다.
이런 가난이었으므로 어머니는 10킬로미터 가까운 거리에 있는 바닷가로 식용의 나문재를 뜯으러 갔다. 그것과 밀기울을 버무려서 식구들의 허기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에 빈속으로 떠난 어머니는 해가 진 뒤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많은 아낙네들이 한 줌이라도 뜯어야 했으므로 나문재는 아주 드문드문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영양실조의 병든 처녀인 고모의 등에 업혀 배고픔을 견디고 있었다.

그때 하늘의 별들을 보게 되었다. 별들은 거의 땅 위 가까이 내려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나는 별이었다. 그런데 그런 별들이 먹을 것으로 보였다. 고모에게 "별 따 줘, 별 따 줘"라고 말했다. "별은 밥이 아니다... 엄마가 곧 온다"라고 고모는 말했다. 나는 울다가 울 힘도 없었으므로 별을 바라보다가 잠들었다. 별이 밥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별에의 첫 인식은 슬픈 일이었다. 또한, 그 사건은 내가 시인이 된 뒤에는 하나의 숨겨진 수치이기도 했다. 별을 노래할 시인이 별을 밥으로 만난 원초적인 궁핍과 착각은 시에 대한 배리(背理)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시란 별은 별 자체로 빛나는 것만이 아니다. 그 별이 밥의 절실성으로 변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훨씬 뒤의 민주화 운동과 함께 차츰 당당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는 초현실성과 현실성의 공존 없이 불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나에게 오기까지
얼마나 아득한 시간의 고단한 길이었을까
별빛이여
이제 나에게 와서
내 온몸 속속들이 우짖는 손님인 것을
나에게 와서
다시 돌아가지 않는 강물인 것을

별빛이여

3. 유전(流轉)

"시인은 세 살 때부터 남을 위하여 울어야 한다"고 나는 어느 시에서 노래한 적이 있다. 아마도 이것은 레르몬토프를 떠올리기에 알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세 살 무렵의 울음이란 인간의 슬픔을 담기에는 너무 이른 것이다. 정작 나 자신의 기억은 네 살 무렵부터이다.

나는 두 번이나 고모의 등에 업힌 기억이 있는데 한 번은 내가 처음으로 별을 만난 밤이었고, 한 번은 내가 태어난 집 4칸 초가가 온통 불길에 휩싸여 집 뒤의 긴 대숲까지 번져 갔던 밤이 그 먼저였다.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고 가족은 울부짖었다. 두레박 우물을 퍼담아 이고 오는가 하면, 고래실 무논의 물을 퍼다가 연신 불길을 잡으려 했지만 집은 다음날 아침 타버린 폐허로 남겨졌다.

그 폐허에서 할머니는 울었고 어머니와 고모는 타다 남은 가재도구를 뒤적였으며 할아버지는 앞산을 바라보다가 술집으로 갔다. 아버지는 별채 3칸에서 새 살림을 구상하면서 가족에게 희망을 불어넣고 있었다. 건너 마을에 가게를 내고 있던 두 삼촌도 잿더미를 치우고 있었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맨 먼저 그린 것은 천석(千石) 지주인 종조부네 안방 벽에 붙어 있는 호랑이 그림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달이 으시시한 구름 자락 사이에 떠 있고 벼랑 아래 달을 보고 일어서는 호랑이였다. 나는 이 그림으로 당장 소문이 났다.

고대 화가 솔거가 절간 벽에 소나무 그림을 그렸는데 학이 그 그림이 실제 소나무인 줄 알고 내려앉다가 벽에 부딪혔다는 이야기에 빗대어 내 호랑이 그림을 본 족제비와 살쾡이가 놀라 달아날 것이라고 마을 어른들이 칭찬했다.
그 뒤로는 화투를 그렸다. 화투 한 목 48장을 그린 뒤 그 그림에 양초를 문질러 화투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내가 화투 10여 목을 그려서 마을 어른들에게 주면 그들은 그림값을 주었다.

뒷날 나는 외삼촌의 많은 장서 가운데 반 고흐에 관한 책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나도 화가가 되기를 뜻하고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피의 그림을 그려보기도 했다. 아마도 나는 외삼촌의 피를 짙게 이어받았는지 모른다. 그는 만주와 동남아 자바 일대를 떠돌았고, 일제말기에는 사회주의 청년이 되어있었다.

내 그림은 대상을 모방하는 극사실주의에서 점점 사실의 변형으로 되어 갔다. 그 뒤로는 주로 기차, 바다 위의 배 그리고 구름들을 그렸다. 아버지가 내 그림을 호되게 꾸짖었다. "너는 왜 집이나 산은 그리지 않고 어디로 떠나는 것만 그리느냐?"

그 뒤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정물화나 초가집 따위를 그리다가 다시 화차를 여러 개 달고 내달리는 기차 그림으로 돌아갔다. 뒷날 영화 <부활><지바고>에서 본 시베리아 철도의 긴 기차와 인도 여행에서 목격한 2천 미터 길이로 이어진 긴 완행열차를 통해서 어린 시절 상상 속의 기차를 다시 만났다.

어디로 떠나는 일이 내 어린 날의 가장 생동적인 염원이었고, 그것이 이루어진 것은 전쟁이 지나간 뒤의 50년대 전반이었다. 정작 떠나는 혼은 상처받고 몸은 병들었으며 떠나가는 곳곳은 폐허였다.

이에 앞서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고향은 북한의 인공(人共) 체제로 되어 버렸다. 6월까지 남한 체제는 좌익인사를 학살한 뒤 후퇴했고, 9월의 인공은 우익계열의 주민을 학살하고 도망쳤다. 이번에는 우익이 도망친 좌익을 수색 검거해 사형(私刑)과 학살을 거듭했다.

소년인 나는 몇 천 년 동안 계승된 농경사회의 혈연적 환경과 촌락공동체의 기반이 하루아침에 해체되어 야비한 이데올로기의 도구가 되는 현실을 목격했다. 아니, 그러기 전 콜레라가 만연했을 때 환자 격리에서 드러난 비인간성을 이미 경험한 적도 있었다.

십대 후반의 내 몸에서 학살시체의 악취가 3주일 동안이나 늘어붙어 있었으며, 그 악취는 빨래비누로 아무리 몸을 씻고 씻어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소년기 마지막 순정은 여지없이 파괴되었고, 나는 고향을 떠나는 일만이 지난 날의 염원을 넘어 절박한 현실문제로 되어 버렸다. 아버지는 집을 떠난 나를 잡아다가 집에 가두었고, 나는 아버지가 마음을 놓을 때쯤 되면 다시 집을 뛰쳐나갔다.
복학(復學) 따위는 내 생각 속에 없었고, 복학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은 나에게 무의미했다.
고향에서 4킬로미터 밖을 모르던 내가 이윽고 그 밖의 세상으로 빠져갔다. 전후 한국의 산악은 좌익 빨치산들의 출몰 때문에 산중에 있을 수 없는 불교 승려들이 평지를 떠돌고 있었는데 그들 중의 하나인 선승을 만나 그를 뒤따랐다.

이로부터 내 삶은 집이 아니라 길에 있었다. 선승 혜초는 불교뿐 아니라 노장철학과 칸트, 스피노자, 헤겔 등에 해박한 사람이었으므로 나는 그의 지식을 빠르게 익혀 갔다. 때로는 길가에서 좌선을 하고 때로는 빈 절에 선방을 차려 선을 펼치기도 하다가 그와 헤어진 뒤 다도해 건너 한 섬에 있는 효봉선사를 찾아갔다.
그로부터 나는 구름과 흐르는 물을 표방하는 집 없는 수행을 온몸으로 받아들였고, 고향의 동족상잔으로 파손된 정신적 외상이 어느 만큼 치유될 수 있었다.

길은 집과 집 사이, 마을과 마을 사이, 도시와 도시 사이를 잇는 수단이 아니라 그 사이들의 목적으로 되었다. 길은 축복의 무한이었다. 나는 길을 걸어가다가 너무 기뻐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고, 모든 길가에 남아 있는 가로수들은 내 혈육 같았다.

진리란 특정한 공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길에 있고, 그것은 언제나 흐르는 상태이며 어디로 가며 어떤 것으로 변하는 상태임을 깨달아야 했다. 그래서 진리를 길 또는 도(道)라고 하고 물이 흘러가는 것을 뜻하는 법(法)이라 하기도 한 것이다.

불교의 이상향인 니르바나(涅槃)의 궁극을 흔히 남음이 없는 니르바나[無余涅槃]로 말하는데 나는 그것을 머무름이 없는 니르바나(無住涅槃)로 말하기 시작했다. 또한, 온갖 생명체와 세계 사상(事象)은 연기(緣起)에 의해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되풀이를 윤회하는데 그 윤회를 벗어나는 해탈과 깨달음 역시 떠도는 해방 혹은 떠도는 깨달음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주의 모든 운행과도 일치하는 것이고, 모든 존재의 변화와도 합의 된다. 존재조차도 의미가 없다. 존재는 이미 변화와 이동으로 진행되고 있으므로 존재가 아니라 행(行)이다. 그 행은 항상 그대로 고정되지 않고 항상 무상(無常)한 상태이다. 아 덧없다!라는 것은 사실 내 마음속의 탄식이기 전에 이미 세상의 객관적 사실이다.

이처럼 모든 세계현상의 유전과 내 운명으로서의 유전을 불이(不二)의 세계로 만드는 세계관이 나에게는 거의 선천적인 것이었다. 그리하여 근대적 자아로서의 나란 끝내 나라는 허상임을 깨달은 다음 자아와 타아의 일여(一如)로서의 진정한 나(無我), 나라는 고착을 넘어 유전으로서의 무한한 나의 자기 변화에 온몸을 묻었다. 범신론의 세계가 그런 나의 유전체험을 가능케 한 것이다.

보아라
저 빈 밤길이
묵묵히 별빛들 삼켜
너를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가고 가거라

길은
네 집이고
네 무덤이고
수 없는 내일의 후렴들이
오직 네 노래를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가고 가거라

가다가 쓰러지면 네 노래 잠시 멈췄다가
그 부근 어디선가
너는 다시 태어나 가거라

4. 폐허

1950년~1953년의 만 3년 간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동서냉전 이데올로기가 폭발한 열전(熱戰)인 동시에 한반도 민족 상잔(相殘)으로서의 내전(內戰)이었다.

한편으로는 미(자본주의)·소(사회주의) 적대관계의 대리전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민족공동체가 파괴되는 남북전쟁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UN군 참전이라는 이름 아래 지구상의 16개국 군대가 그 전쟁에 참가함으로써 수많은 전사자와 엄청난 재산피해 그리고 전쟁비용을 써 버린 전쟁이었다.

이로써 산하는 초토가 되고 도시들은 거의 전부 폐허가 되었다. 오래동안 삶의 시련을 함께 겪었던 동족이 두 진영으로 갈라서서 서로 죽이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인간 실존의 내면에 잔인한 살의가 넘친 뒤의 폐허가 자리잡았으므로 그 시대의 댓가는 폐허로밖에 표현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폐허에서의 수많은 정치적 폭력과 비인간적인 사례들 앞에서 문학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문학에 관한 그런 질문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역설적으로는 폐허야말로 시의 원인이 떠도는 곳이었고, 폐허야말로 문학의 엄연한 성지(聖地)이기도 했다. 전후의 초토에서 시의 존재 이유는 이렇게 처절하게 발생한 것이었다.

이런 50년대 전후(戰後)의 한 시인으로 세상에 나옴으로써 나는 폐허의 자식이었고, 그러므로 내 정신의 원점에는 언제나 그 폐허의 낙인(烙印)이 찍혀 있게 된다.
유난스럽게도 나는 나 자신을 '고은은 곧 폐허다!'라고 가슴 속에 새겨 넣음으로써 어떤 다른 가치로 그것을 대체하고 살지 않았다. 폐허는 당연히 고아의 땅이기도 하다. 어떤 전통도 가부장(家父長)도 고향에 대한 집착도 다 팽개침으로써 하나의 시간적 단절이 만들어낸 실존으로 나는 내던져진 것이었다.

실제로 나는 폐허와 바라크 노천술집 그리고 벌거숭이 산등성이 길을 떠도는 부랑자의 혼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태양은 늘 일그러진 채 황량한 땅에 그 빛살을 내리꽂았고, 달은 늘 배고픈 늑대의 절규를 들어야 했고, 그렇게 삼라만상의 숨결을 빨아들여야 했다.

그런 폐허에서 불면증으로서의 오뇌. 그리고, 퇴폐와 허무주의 그리고 식민지 시대의 폭력화된 아나키즘이나 무신론적 실존주의, 그 밖의 책벌과도 같은 자기학대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시는 가장 매혹적인 극약이었다. 시는 종교보다, 사랑보다 훨씬 진정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건너온 구호양곡과 물자 헌 옷으로 '세느'니 '파리'니 '누아르'니 하는 프랑스 취향의 이름이 붙은 다방에 드나들며 《구토》와 《이방인》을 말하고, T.'S 엘리엇의 《황무지》를 이야기하는 곳에 어른대게 되었다. 한국 근대문학 자체가 태생적으로 피할 수 없는 이같은 이식론적(移植論的) 편향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오랜 전통과 풍속에 예속된 자아가 반란을 일으킨 경우이기도 했다. 전쟁은 존재의 시작인 것과 동시에 존재에 대한 심각한 손상을 입혀 기우뚱거리게 했고, 그 살아남은 존재의 기억에는 온통 백병전이나 죽은 자들의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이런 극한상황과는 달리 후방을 떠돈 문학은 아무런 사회적 책임감도 가지지 못했으며, 전후의 시가 그런 허기를 메워줄 만한 예술적 성취를 단번에 실행시키지도 못했다. 그 실패 역시 그 시대에 주어진 조건이었는지 모른다.
나의 서정세계는 그러므로 바람에 들어올려지는 새의 터럭처럼 어설픈 풍경을 반영했다.

폐허밖에 없었다
녹슨 철로는
더 이상 기적소리를 기억하지 않았다

50번 이상
빼앗고
빼앗겼던 백마고지
그 격전지에 풀이 돋아났다

폐허의 밤 모닥불이 정다웠다
하지만 아직도
너는 내 죽음이고
나는 네 죽음이었다 불 쪼이면서
모두 혼자였다

나는 태어난 곳을 잊어버렸다

5. 선적(禪的)인 것

나는 여러 가지 중에서 그 중의 하나로 불교를 선택하지 않았다. 불교는 해후(邂逅)였다. 아무런 예감도 없이 거기에 속해 버린 것이다.

고향의 좌익과 우익 핏자국이 아직껏 남겨진 채 내가 미 육군 항만사령부 검수원이 되어도, 중학교 국어교사로 특채되어 학생들에게 낱말 뜻풀이를 해도, 내 정신적 외상(外傷)은 금방 튀어오를 용수철처럼 억눌려 잠복해 있었다.
염세주의는 거의 체질적인 것이 아닌가 싶도록 하루하루 고향 항구의 폐허를 떠도는 이유가 되어 주었다. 전후의 절망, 불안 그리고 밤을 지새우는 지독한 불면증과 까닭 모를 번민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세계는 과장되었다. 나 자신도 하나의 과장된 세계였다. 사람들은 나더러 귀신이 붙었다 했고, 미쳤다 했다. 전쟁 이전의 동정(童貞)으로서의 감수성은 깨져서 분열증에 다가가고 있었다.

K-8 미 공군기지 부근의 양공주들의 편지를 대필해 주며 지낼 때 그 중에 한 여자가 내가 불면증 때문에 낮에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너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송장이다. 너 내 편지 안 써줘도 좋으니 어서 꺼져라" 하고 말하며 나를 쫓아냈다.

요컨대 나는 현세적으로 뿌리 박히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내가 디디고 있는 땅도 지진으로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시기에 한 늙은 학승으로부터 화엄학의 냄새를 맡았고, 한 멋진 운수승(雲水僧)으로부터 선(禪)의 풀더미 불길이 닿은 것처럼 활활 타올라 나는 거기에 파묻혔다. 화엄과 무(無)의 세계! 그것은 내 비종교적 성향과 종교적 성향의 모순이 첨예해지면서도 어떤 갈등도 없는 것처럼 내 심신을 깊이 품어 주었다.

어느 날 길에서 만난 선승 혜초를 나는 어린 노예처럼 뒤따라갔고, 의붓자식처럼 항상 적막한 명봉에게 경전을 배웠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는 화엄세계와 "이것도 저것도 다 헛깨비다"라는 선의 세계가 함께 내 정신의 영역을 형성시켜 주기 시작했다.

첫 화두 '만법귀일 일귀하처(万法歸一 一歸何處)'로 화기(火氣)가 올라 얼굴과 머리가 온통 화두꽃이 피어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그 뒤 간화선을 버리고 묵조선(默照禪)을 시도했다. 대혜종고(大慧宗杲)가 굉지(宏智)의 '묵묵히 말없는 곳 소소령령하게 나타남이여(默默忘言昭昭現前)'가 나에게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은사 효봉이 내려준 무문관(無門冠) 제1칙 조주(趙州)의 '무(無)' 화두를 잡아 비로소 내가 탄 배는 중심을 잡고 파도를 가르며 나아갈 수 있었다.

선은 말을 버린다. 언어도단이다.
선은 글을 죽인다. 불입문자이다.
선은 바로 마음을 뚫어버린다.(直指人心)
선은 부처와 조사를 죽이고 부모도 뭣도 다 죽여 버린다.(逢佛殺佛)

은사의 첫 가르침은 "너는 책을 버려라. 너에게는 책이 제1 마구니(魔軍)이다"였다. 훨씬 뒤 나는 은사에게 대들었다. "왜 스님은 운문(雲門)의 떡과 조주(趙州)의 차(茶)를 말하십니까? 임제(臨濟)의 소리[喝]도 따지고 보면 말이 아닙니까. 덕산(德山)의 몽둥이도 따지고 보면 글이 아닙니까? 8만대장경의 혓바닥은 또 무엇입니까? 조사들의 게송(偈頌)은 또 무슨 말장난입니까?"

은사의 대답이 있었다. "네 입 안에 넣어 줄 돌멩이를 가져오너라."

나의 입선(入禪)은 때로는 치열하고 때로는 좌절에 부딪혔다. 이런 저돌적인 수행은 10년으로 중단되었다. 요컨대 '말뚝신심'은 길지 않았다.

역대 조사들이 그들이 부정했던 문자―최소한의 문자―를 통해서 해방된 세계의 일단을 표현하는 게송(시) 한두 편을 남긴 매혹은 문자부정이 폭력이 아니라 문자로부터의 무애(無碍)를 실현한 하나의 발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의 깨달음을 보여주는 오도송(悟道頌)이나 세상을 아무런 집착 없이 하직하는 노래인 임종게(臨終偈)는 하나같이 생사로부터 자유로운 경지이다.

그런데 선사들의 이같은 활달한 면목이 도리어 시가 추구해야 할 인간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삶의 여러 체험 내용에의 실감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시의 해방보다 시의 '부자유'로서의 삶에 상상세계라는 반사경을 비쳐 보고자 한 적도 없지 않았다.

다만, 동양정신 고도의 직관으로서의 선은 언어의 직관에 대해 자기 동일성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으며, 진실에 대한 왜곡을 타파할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자주 알아차렸다.

나는 인간의 선 수행보다 동물들, 예컨대 학이나 거북 그리고 새와 가축들, 그것들의 삶을 중생의 미혹(迷惑)으로 규정하기보다, 일상적인 호흡이나 탐욕 없는 생태와 과거 또는 미래에의 망집 없는 결코 인간이 다 터득할 수 없는 그것들의 선적(禪的)인 세계를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衆生)을 깨달은 자인 부처와 깨닫지 못한 자인 중생을 계급적 관계로 파악하지 않고, 중생은 내일의 부처라는 전망과 함께 중생을 모든 인간중심적 오류를 넘어선 생명현상의 커다란 존엄성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중생이란 그러므로 삶의 공동체를 뜻한다는 것이 내 신념이었다.

그래서 나는 유일신론보다 범신론을, 인간 유일주의가 아닌 중생·공생·상생주의, 국가주의보다 세계유기체주의 속에서의 자기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불교와 만나지 않은 아프리카 오지이건 서구의 어느 전통이건 각자가 자기의 중심에 있다는 원융회통의 경지를 지향하고 있는 것을 나는 세계라고 인식한다. 어디에, 시간이나 공간이 누구의 소유겠는가.

6. 내 죽음에 이르는 병과 어느 분신자살

죽음은 시의 오랜 주제이자 나에게는 또 하나의 삶이었다. 10대 중반 고향에서 어린 아우가 죽은 것을 비롯해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죽음과 마을의 콜레라 사망자 그리고 학살당한 수많은 주검들을 보게 된 전쟁시기의 내 의식에 죽음은 일상적으로 자리잡았다.

관념의 거의 전부가 죽음으로만 충당된 적도 있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삶의 의미가 없게 되었다. 특히 30대 대부분의 나날이 심한 불면증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닫힌 입을 아무리 열려 해도 열리지 않은 그 죽음은 타인의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가녘을 에워싸고 있는 닫힘이었다.

전후 폐허는 그 자체가 하나의 죽음이었고, 그 죽음의 장소에 서 있는 나는 이미 죽음으로부터 끊임없이 암시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현세에 대한 추상적 절망은 길었다. 내 회색의 염세주의는 쉽사리 해소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음은 그런 것들의 다음에 늘 와서 엄연히 대기하고 있는 부채(負債)와도 같았다.

나는 약국을 전전하며 주민등록증을 내보이고 나서 하루치 수면제를 사 모았다. 그리고, 치사량이 훨씬 초과된 그 병 속의 알약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움이 되었다.

이미 고향의 항구에서 첫 자살미수사건이 있었다. 미 항만사령부 운수과에 근무하는 동안 부두 노동자들의 자정 야식시간을 이용해서 부두와 선체 사이의 물 속에 투신자살한 것과 친구의 화실에서 음독 자살한 것이 모두 미수에 그쳤고, 제주도행 야간 여객선에서의 투신 미수까지 세 번의 실패가 있었다. 20대부터 줄곧 나에게 늘어붙어 있는 것이 자살의 유혹이었다.

60년대를 마감하며 내 불면증은 극도에 이르렀고 날마다 눈은 충혈되었으며 낮 동안의 의식은 몽롱하거나 광란 직전에 허덕이고 있었다. 술만이 구원이었고 술 취하면 야차(夜叉)처럼 밤거리를 휘저어댔다. 그 폭음과 그 주란(酒亂)만이 내 만능이었다.

눈이 내리는 서울 삼각산 정릉골짜기 산등성이를 두 개나 넘어간 인적미답의 비탈에서 소주와 함께 수면제를 먹어 버렸다. 눈 내리는 것을 바라보다가 의식이 없어졌다.

하필 그날이 예비군 훈련이 있는 날이었다. 정릉 일대가 적의 침투지역 혹은 취약지구로 지정되어 사람이 전혀 가지 않는 산의 오지까지 훈련작전 범위로 잡혀 있었던 것이다. 예비군들에게 눈에 덮여 뻗어 있는 내 시체가 간첩이나 무장 적병의 변사체로 인지되어 내 몸은 그들에게 운반되어 산줄기를 넘어 정릉 골짜기 입구의 여관 마당에 내던져졌다.

훈련병들이 간첩이 아닌 것으로 확인하자 행려병 사망자로 단정해서 처리하려다가 지휘관이 내 신체를 부근 병원으로 보내 정밀검사를 시켰다. 그때까지 생명이 아득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24시간이 지나서 내 의식이 회복되었다. 치안관서 출입 신문기자들을 통해서 친구 몇이 찾아왔고, 그들이 내 사건이 신문에 나지 않도록 막아 주었다.

신기한 일은 한 차례 자살이 미수에 그치면 그 뒤의 자살 계획이 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수를 거듭한 심사(心思)는 음울하기 짝이 없었고, 나 자신이 죽은 자의 혼령이나 유령인 것처럼 여겨졌다. 특히 거울 속의 얼굴은 영락없는 저승의 망령으로 보였다.

1970년 11월 하순 서울 무교동 술집에서 통금시간을 넘겨 술 마시다가 그 술집 탁자 위에서 만취한 상태로 잠들어버렸다. 새벽녘에 그 술집 바닥에 구겨져 있는 인쇄물을 통해 노동자의 분신자살사건을 알게 되었다. 자살에 관한 한 가장 관심이 깊은 나에게 그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아보려는 충동은 당연히 큰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 자신의 내적 갈등과 굴절 이외에는 어떤 사회적 관심과도 상관없던 나에게 현실에 대한 시야가 생겨났다.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을 통해서 내 죽음에 대한 유혹은 오랫동안 들씌워진 장막을 걷어내기 시작했다.

이 과정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사회적 모순문제, 분단문제 그리고 군사정권의 파쇼정치 등에 대한 여러 대응에 내 현실의식의 동작이 가능했다. 처음에는 맞지 않은 옷처럼 부자연스러웠으나 그 현장에서의 환영에 의해 곧 자연스러운 저항의 실체가 될 수 있었다.

모든 진리는 현실을 통해서만 살아 있다고 확신했다. 이 늦은 확신에 이르는 동안 지난날 긴 시간들의 막막한 나열 속에 끼어 있던 고뇌의 자국들이 하나하나 지워지기 시작한다.

친구들도 바뀌어 버렸다. 최인훈에서 백낙청으로 바뀌었고 후배도 김현에서 황석영으로 바뀌었다. 육친적이던 우정 이후 전투적인 동지가 내 환경이 되었다.

진영론(陣營論)에 기울어졌다. 함석헌, 문익환, 안병무, 천관우(천관우의 경우 70년대에 한함)`와 리영희들의 얼굴이 내 행복에 담겨졌다.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나는 문단 동료 신경림, 백낙청 등과 자유실천모임협의회를 결성, 대표가 되었다. 이어서 종교계 함석헌, 정계 윤보선(윤보선의 경우 70년대에 한함), 김대중, 김영삼, 학계 김성식 등과 문단 김규동, 김병걸, 백낙청 등과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 그 세력을 전국화하는 데 뛰어들었다. 박정희 정권은 그때부터 나를 만성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한국 인권운동협의회 부회장, 70년대 말 국민연합중앙상위 부위원장 그리고, 80년대 후반 6월 항쟁 당시 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를 역임하면서 민주화 및 통일운동의 전선에 나가 있었다.

한국예술인총연합을 결성, 대표했고 민족문학작가회의를 친구들과 창립했다.

한 노동자의 분신자살이 당시 많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그 중의 하나인 내 행로도 완전히 바꿔 다른 나로 만들어 준 것이다. 나는 서슴지 않고 말한다. 나는 70년대부터 그 이전의 효봉을 꺼내고 전태일을 담았다, 이것이 내 가슴이다,라고.

더 이상 죽음의 유혹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10년 간의 긴 불면증도 하루아침에 사라져 늘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내 시에서 허무의 냄새가 증발되었다. 때로 내 서정세계는 현실의 언어가 요구하는 분노 때문에 그 누구의 관도 내려놓지 않은 상태로 빈 무덤을 만들기도 했다.

탄압과 감옥 그리고 온갖 불이익들은 차라리 축제였다.

이런 시기의 시 <화살>이 있다.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박혀서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우리 모두 숨 끊고 활시위를 떠나자...

허공이 소리친다 허공 뚫고 온몸으로 가자 저 캄캄한 대낮 과녁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단 한 번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돌아오지 말자...

7. 20년 이후

1970년부터 90년대까지의 20년은 그 이전과 이후를 아우르며 인상적으로 내 문학의 변화를 세 기간으로 설정하게 만들었다. 초기시와 현실 참여의 시 그리고 90년대 이후의 내재적 순환기의 시로 구분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 세 시기 중의 두 번째 참여 시기의 시련은 시에 대한 집중이 거의 불가능했다. 때로는 심미적이고 때로는 허무적인 세계로 번져간 초기의 개인적인 삶과는 달리 현실 속의 나에게는 세상의 온갖 시선이 나에게 닿아 있었고, 나 역시 시도 저항의 한 도구로만 써야 했으므로 거리에서, 대학 총학생회의 숨은 방에서, 또는 시위 현장의 광장에서, 술집에서 시를 정치화했고 김소월의 산유화와 말라르메의 밤 따위는 상상할 수도 없게 여기저기에서 늘 숨차고 있었다.

한갖 감정이나 사상의 파편들을 깊이 가라앉혀 한 줄의 절구(絶句)가 나오는 시의 행위, 오랫동안 상상과 체험으로 얻어낸 시의 정물적(靜物的)인 위엄은 다 떠났다. 모든 가치는 무기에 있었다. 시가 가장 순결한 싸움의 도구였고, 나는 그런 시를 가진 전사이고자 했다.

그 동안 네 번의 감옥 몇 해와 많은 구금, 연금으로 이어지는 날들이었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24시간 밀착감시로 정보부 요원, 정보과 형사와 동행 동거해야 했다. 고막은 고문으로 파열되어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내 심신은 망가지지 않고 모질게 살아남았다. 몇 차례의 현실 정치 유혹의 그물에도 걸려들지 않았으므로 시 이외의 세계 밖으로 이탈하지 않았다.

특히, 1980년 광주 항쟁의 상황과 밀접한 내란음모죄, 계엄법 위반, 계엄교사 등의 전두환 신군부 검거로 나는 생사의 기로를 헤맸다. 그 극한상황은 내 문학에도 이른바 예술적 충동을 일으켜 80년대 중반 <만인보>와 <백두산>등의 대작을 낳았다.

나는 박정희를 암살한 중앙정보부 김재규 부장이 갇혀 있던 육군교도소 특별감방 7호에 갇혔다. 창이 없는 미로의 감방이었다. 방 안에는 소변통 하나만 있었다. 그 방에 40촉의 전등이 꺼지면 사진을 현상할 만한 어둠뿐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시와 만났다. 볼펜은 고사하고 종이 한 장 허용되지 않는 그곳에서 상상 속에서만 시는 가능했다. 김대중은 사형수였고 우리들도 살아 나가는 일은 가망 없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의 시 구상은 마치 고원의 들꽃 같았다.

육군 소장 출신들의 역대 군사정권이 끝난 뒤인 1992년대에 나는 사면되었다. 처음으로 여권이 나오게 되었고 내 시 한 편이 중고등학교 국정 교과서에 수록될 수 있었다.

한 시기에는 문예잡지의 문인주소록에서도 내 이름이 삭제되었고, 출판물에서도 가명을 지어 내 글을 사용했다. 아직도 오랜 기득권의 기반이 된 극우세력은 나를 매도하고 있으나 더 이상 특별요시찰 대상이 아닌 나는 빈 몸으로 돌아가 아무런 감시 없이 들길을 걸어갈 수 있다. 이 얼마만의 자유인가.

시 혹은 문학에 대한 내 생각은 문학을 이데올로기로 고착시키지 않는데 있다. 문학이 정치와 단절될 수 없는 현실유기체임이 분명하고 작가는 지속적으로 사회적 관심으로부터 일탈할 수 없다. 하지만, 문학의 존엄성만이 문학의 예술적 존립을 지켜 준다는 것과 시가 시의 자궁인 현실이 있어야 태어난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나는 나만의 동굴과 내가 내달릴 산야가 필요한 시의 맹수인 것이다.

특히, 문학의 여러 경계를 허무는 일에도 나는 은연중 익숙하다. 장르 확대와 장르 혼합이라는 문제도 그렇고 리얼리즘과 비리얼리즘의 상호삼투도 그렇다.

이제 내 문학은 변증법적이건 비변증법이건 하나의 용암류와 같은 종합세계와 직관으로서의 세계 또는 인간의 다양한 서사활동으로서의 세계 그리고 한 소년적 서정체계에 걸쳐 있기를 꿈꾼다.

이와 함께 내 후기의 문학이 어떤 귀결이나 체념의 이웃인 해답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발생시키는 힘의 자재(自在)를 지속하게 되기를 바란다. 문학은 누구에게도 나에게도 죽어 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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