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연보

전생연보(前生年譜)

먼 옛날 세습 방랑시인으로 출생. 한때 디오니소스의 친구.

BC 1125
카스피 해안에서 암말로 출생.
BC 0017
시베리아 예니세이 유역에서 인간으로 출생, 아기 무당.
1302
장소 미상(未詳)의 술집 주모.
1422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출생. 주로 행상.
1597
내몽고 출생, 목동.
1634
조선 삼지연 출생, 화전민 피리를 불었다.
1689
조선 추풍령 출생, 일자무식 나무꾼.
1770
여수 돌산도 출생, 무사승(無師僧).
1847
안면도 출생, 귀머거리 머슴. 술을 너무 좋아했다.

금생연보(今生年譜)

'내가 죽고 나서 몇 년 뒤 누군가가 내 무덤을 파헤쳐본다면 거기에도 내 뼈 대신 내가 그 무덤의 어둠 속에서 쓴 시로 꽉 차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내가 살지 않는 미래까지도 내 시의 현재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너무 시에 집착하나? 하기야 시와의 결별 바로 옆에서 내 시는 실재하기 때문에 내 집착은 그것으로부터의 해탈에도 속한다.'

1933
8월 1일(호적에는 4월 1일로 잘못 등재됨) 군산시 미룡동 138번지(그 당시는 전북 옥구군 미면 미룡리 용둔부락)에서 아버지 고근식(高根植) 어머니 최점례(崔點禮)의 장남으로 태어남(음력 6월 10일 아침 10시). 본명 은태(銀泰).
1950년의 6·25 전쟁 중에 이름의 끝자는 떼어내고 은(銀)이라고 자칭한 이래 오늘에 이름.
어린 시절은 <암사내>라는 별명이 붙여졌는데, 이는 사람들을 보면 유난히 부끄러움을 탔기 때문. 당숙이 집에 와도 두 손바닥으로 새빨개지는 낯을 덮고 있다가 도망치기 일쑤였음.
중농(中農)과 빈농(貧農)의 변전이 심한 가운(家運). 9세까지 이 마을 저 마을의 서당을 전전하며. 백수문(白首文)부터 동몽선습, 소학, 논어 등을 익혔음.
1943
미룡국민학교 입학. 그해부터 조선어 교과과목이 폐지되어 일본어만으로 수업. 그러나 마을 머슴 대길이 아저씨로부터 <언문>을 배웠으므로 탄금대인(彈琴台人)의《의지할 곳 업난 청춘》을 주룩주룩 읽다가 종조부한테 혼나기도 했고, 신식 연애소설 따위를 마을 아저씨들을 통해서 빌려다가 탐독. 일본 이름 다까바야시 도라스께(高林虎助).
3학년 때 일본인 교장 아베(安部)가 장차 무엇이 되겠는가 하고 물었을 때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이 육군대장 해군대장이, 또 여학생은 간호부가 되겠다 했는데 나는 천황이 되겠다고 해서 그 때문에 천황모독죄의 퇴학처분을 간신히 넘기는 대신 3개월 동안 하루 3시간씩 썩은 보리에서 덜 썩은 보리를 가려내는 악취 속의 강제 작업을 했음. 고독을 체험.
그림과 작문에 재미가 생겨났음. 이 무렵의 마을 동무 이관전.
1945
8·15해방으로 월반(越班), 단번에 동급생이 하급생이 되어서, 허약체질로 주눅이 든 처지에서 해방되었음. 학교 친구 문수원, 고근상 등.
해방 직후 새로 부임한 권모(權某) 교장이 친일파라 해서 교내 동맹휴학을 하는데 주모자의 하나로 되었음. 최칠봉, 고재영 교사의 사랑을 받음.
1년 뒤 신설된 군산 사범학교 입학시험에서는 성적은 단연 우수 했으나 동맹휴학사건 때문에 품행문제로 불합격 처분을 받고 다음해 군산중학교에 5백 명 중 수석으로 입학. 그러나 이후 공부를 싫어하고 선생을 무시했음. 급장 부급장 따위를 내놓고 미술부에 들어가 교내전에서 1등상을 받기도 했음.
어느 날 저녁 10리길의 학교와 집 사이의 길에서 시집《한하운시초(韓何雲詩抄)》를 습득, 그 시집을 밤새도록 읽고 가슴이 찢어 질 것 같은 문학적 충격을 받음.
이광수, 노자영 등을 열심히 읽기 시작함. 몇 번 출분(出奔)했으나 그때마다 아버지한테 잡혀서 집으로 돌아왔음.
해방 직후에는 특히 반탁(反託) 동맹휴학, 단정(單政)반대 동맹 휴학을 즐기고, 새벽에 상급생의 지시에 의한 벽보 붙이기 심부름 등에 참가했음. 강 건너 장항 제련소의 굴뚝에서 늘 영원감(永遠感)을 체험함.
1950
6·25전쟁으로 4학년 휴학. 이때부터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기 시작함. 3개월 동안 인공 치하. 밤에는 인민군의 명령으로 비행장 강제노동, 미군의 함포사격, 폭격 등으로 파손된 활주로 복구작업을 하고 낮에는 집에서 노동. 이때 한 마을의 선배 김기호와 함께 그는 효성(曉星) 나는 호성(湖星)이라는 호를 쓰며 시를 습작하기 시작했음.
9월 수복 전후 동족상잔의 참극에 의해서 정신착란 상태가 지속 되면서 그때까지의 농촌적 순결이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함. 가출사건이 빈번해 짐.
1·4후퇴로 서해 선유도에 부산행의 피난선을 버리고 기착하여 멀미를 가라앉힌 이래 아버지와의 피난살이에서 문학 지망의 은사 김종숙(金鍾淑)과 함께 하루에도 몇 10편의 습작 시를 지음. 그 무렵까지의 시 원고를 정리하여 <아름다운 전설>이라고 이름 붙였으나 그 뒤의 입산(入山) 당시 불살라 버렸음.
피난에서 돌아와 군산의 미(美) 제21항만사령부 운수과 검수원, 군산 북중학교 국어 및 미술교사 (그 당시에는 교사 자격이 없이도 ×동(童) 운운해서 특채될 수 있었음) 따위를 하다가 옥구 대야(大野)에 가서 엿장수도 했음. 이병기, 신석정, 백양촌, 김수영 등을 만남.
자학증상이 깊었으며, 군산항에서 자살을 시도했으나 일본인 항해사가 건져 냈음. 화장도 하고 다녔음. 두 귀에 청산가리를 넣어서 고막이 녹았으나 하나는 구제.
고향의 문사(文士) 전학배(田鶴培)?옥배(玉培) 형제에게 심취. 그들을 찾아가서 밤새 우는 일이 많았음. 학업 계속을 거부하여 가정불화. 지방의 선배 문인 목련(木蓮 宋基元)과 감격적으로 만남.
1952
불교 승려가 됨. 법명(法名) 일초(一超). 효봉(曉峰)스님의 상좌가 된 이래 12년 동안 수선(修禪)과 만행(萬行). 목포 유달산 암굴의 거지대장 수제자가 되어 거지 의발(衣鉢)을 전수받음. 구걸 행각에 한동안 몰입. 훨씬 뒤 청담(靑潭)스님과 함께 한 서울 등지에서의 탁발행각(托鉢行脚)도 이때 길들여짐.
1957
서울 선학원(禪學院)에 들어감. 불교 총무원 간부, 전등사 주지, 해인사 교무 및 주지 대리 등 역임.
《불교신문》을 이행원(崇山)과 함께 창간, 초대 주필이 되고 그 신문에 논설, 시문 등을 발표함.
1958
시 <폐결핵>을 친구인 나병재(羅丙哉)가 투고해서 조지훈 등의 천거로 한국시인협회 기관지 <현대시>에 발표되면서 시단에 나옴.
이어서 <봄밤의 말씀> <눈길> <천은사운泉隱寺韻> 등이 서정주의 단회(單回) 추천으로 발표되었음. 구자운, 박희진, 박재삼, 이형기, 김관식 등과 친교. 화단의 신인 김창렬, 나병재, 김서봉, 안상철, 하인두, 박서보, 등과도 교류, 박고석, 전봉초 등과도 자주 만남. 친구인 시인 백종구, 화가 나병재의 결혼 주례를 비롯, 승려 시대의 결혼 주례가 1백여 회.
비가 오면 조계사 마당에서 벌거숭이로 뛰놀았는데 그럴 때는 다른 승려들도 벌거숭이로 따라나섰음.
1959
첫 시집《불나비》40편의 시가 인쇄 도중 화재로 전소되어 작품을 다 잃었음.
해인사에서 단식 21일, 용맹정진의 수행이 잦았음.
첼리스트 조현진(趙顯瑨)과 친숙.
1960
시집《피안감성彼岸感性》출간. 해인사 승려 혜정(慧淨)과 대구의 독일어 교사였던 시인 송영택이 시집 출판에 도움이 되었음. 오상순(吳相淳)과 동숙. 전후문협(戰後文協) 결성에 참가.
1961
장편소설《피안앵彼岸櫻》출간.
《반야심경해의般若心經解義》《불교의 길》(선학원) 출간, 각각 등사본.
전국승려대회 지도위원, 중진회의 등을 탈퇴하고 평 승려로 돌아감. 도우회(道友會) 회장 피선. 그러나 교단 혁신운동을 위한 청년 승려 단합을 서두르다가 그것이 단순한 종정 하야(下野)를 위한 음모로 오판되어 징계회의에 회부되기도 함.
강연 행각. 이때부터 10여 년간 '가짜 고은'이 전국 각 지역에 출몰함.
1962
한국일보에 환속선언을 발표하고 환속, 그동안 품수(稟受)한 대덕법계(大德法階)를 반환. 중생제도에 대한 환상이 강해서 그 때문에 현실에서의 좌절이 몇 번 있었음.
숄로호프의 소설을 읽고 충격을 받아서 그동안 써둔 원고들을 불질러 버리고 절망에 빠짐.
폭음의 주란(酒亂)과 퇴폐. '가짜 고은'도 환속한 세속인 차림으로 고은 행세를 하고 다녔는데 경주, 김천 등지에서는 한글 백일장 심사위원장, 한시대회(漢詩大會) 심사위원, 서울에서는 모대학 영문과 졸업반인 여대생과 결혼하고, 제주도에서도 충남대 가정과(?) 출신의 여자와 동거하는가 하면, 계룡산에서는 공주지방의 문학청년들의 추앙을 받으며 금품 수취도 일삼으며, 각종 사기행각을 함. 이 때문에 본인에게 피해가 막대했음. 5여 년 뒤에 하나는 제주도에서 체포되고 다른 하나는 10여 년 뒤에 서울에서 경찰과 합동으로 체포하여 훈방.
《세계전후문제작품집 - 한국전후문제시집》에 <고은집高銀集>을 수록. 구상(具常)과 친교.
1963-66
제주도 기류. 처음에는 제주해협에서 투신자살을 뜻했으나 만취한 상태에서 자살이 포기됨.
제주시 화북동에 도서관을 설치하고 금강고등공민학교를 개교, 교장 겸 국어 미술 교사로 있으면서 무료수업으로 3년간 1회 졸업생까지 배출. 폭음. 어느 때는 만 3일을 자지 않고 마시기도 했고 술취해서 공동묘지에서 잔 일도 허다함. 최현식, 김종철, 이영복, 문성선, 박만영 들이 그때의 벗.
장시 <니르바나> 발표. 서울의 김수영(金洙暎)이 자주 격려를 함. 불면증 심각, 허무주의에 침윤, 반주로 소주 4홉짜리 한 병이 거의 다반사. 바지란 바지는 다 가위로 잘라서 반바지를 만들어 입고 다님. 서울의 신동문(辛東門)이 늘 보살펴 주었음.
서귀포와 마라도에 사로 잡힘. 한라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가까스로 구조됨. 김현 등이 찾아옴.
시집《해변의 운문집》출간.
1967
서울행을 결심, 15일 동안 송별회 술을 마시고 제주도를 떠남. 민음사 박맹호와 만남. 윤호영의 도움으로 홍릉에서 기거.
수필집《인간은 슬프려고 태어났다》, 시집《신, 언어의 마을》 출간.
민음사, 신구문화사의 편집실에서 생활. 신동문의 술을 최인훈, 염무웅, 김현 등과 자주 마심.
1968
수필집《G선상의 노을》,《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출간.
한국 뮤지컬 대본 <한강>집필 - 예그린 악단의 공연 제목은<정이 흐르네>.
《세대(世代)》에 연재·기고를 자주 했고, 이광훈, 이중한, 권영빈 등이 내 글을 게재하기 좋아했음.
1969
정릉으로 이사. 화가 박고석 등과 친교.
자취와 매식, 폭음·만작(晩酌)의 주벽.《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절망의 메시지》 출간. 장시 <사형(死刑)>(大日蝕 改題).
동화통신 부장대우로 취임, 이것이 유일한 직장생활. 외신기자 구락부 살롱을 취중 난동으로 파손시켜서 그 일로 바로 사직, 저술에 전념.
1970
단시집(短詩集)《세노야》출간. 신민당 대통령후보의 신문 발표용 선언문 초안 청탁이 송원영(宋元英) 측으로부터 문공부 차관직 제시로 있었는데 사절.
정교하게 추진한 음독자살이 정릉 골짜기 취약지구 예비군 특훈 때문에 의식불명의 신체가 발각되어 경찰에 의해 입원, 만 30시간 만에 의식 회복. 장기간 치료 및 휴양.
아버지 병사(病死)로 20여 년 만에 밤중에 고향에 감.
노동자 전태일(全泰壹)의 분신자결로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
1971
연희동으로 이사. 수필집《한 시대가 가고 있다》 출간.
송지영, 남재희,《문학과지성》편집 동인 등과 술을 자주 마심.
1972
《1950년대》제1권 출간. <노래의 사회사(社會史)>를 한국일보에 연재.
1973
화곡동 46-308로 이사. 이 이사 이후 이른바 허무주의의 대표자라는 딱지를 떼어내고 역사의식의 출발이 실현됨. 박정권 3선 개헌반대 운동의 첫 단계인 개헌청원 운동에 문인대표로 참가. 백낙청 등과 동반하기 시작함.
세칭 문인 간첩단사건 구명운동을 주도하고 민청학련사건의 김지하 석방운동도 개시함.《이중섭평전》을《신동아》에 연재, 출간(영화화). 중편《파계(破戒)》영화화.
1974
작가의 사회적·역사적 책무를 절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백낙청, 이문구, 박태순, 염무웅, 이시영, 송기원, 조태일, 황석영, 신경림, 장용학, 등과 결성, 초대 대표간사로 활약. 제1차 선언문 발표. 데모 중 체포됨. <민주회복국민회의>에 문인대표로 김병걸, 백낙청 등과 참가. 이때부터 경찰서, 정보부의 고객이되어 유폐되는 일이 다번 했음.
시집《문의文義마을에 가서》. 장편소설《일식日蝕》(영화화 됨)을 출간,《이상평전》을《세대》에 연재, 출간. 장편소설《어린 나그네》를 《독서신문》에 연재, 출간.《고사편력(古寺遍歷)-나의 방랑放浪 나의 산하山河》출간. 편역서 《당시선》, 《두시언해》 출간.
대학에 출강하기 시작한 이상화(李相華)와 만남.
제1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동아 자유언론투위와 동조, 동아일보지광고의 격려광고 운동에 박차를 가함.
강연, 선언문 낭독 등에 의해 당국에 연행, 장기구금. 전담형사 및 정보부 기관원의 24시간 감시·동침·동행이 계속됨. 심지어 친지의 결혼식에 갈 때도 동행하고 술집에도 함께 가서 앉아야 했음.
서울대생 김상진 추도식 때문에 명동 수녀원에 피신, 끝내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추도식을 함세 웅신부 등과 개최.
1975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선포로 일단 칩거당함. 한동안 절필(絶筆)하다가 집필 재개. 이 1년 동안 소주 1천 병을 통음(이 계산은 이문구가 해주었음).《서울평론》에 연재했던《한용운평전》 출간.《세대》에 연재한《제주도》 출간. 민음사의<오늘의 시인선>의 고은시선《부활復活》 출간. 역주《초사(楚辭)》출간. 이남덕, 이효재, 박순경, 이종복, 권영빈, 강운구, 등과 설악산에서 자주 만남.
1976
지학순, 김승훈, 함세웅, 백낙청, 박태순, 이문구 등과 <김지하 구출위원회>를 결성, 부위원장으로 석방운동 개시.
이우정 등과 동일방직사건에 대한 대책위원회, 상고사 대책위, 원풍모방 대책위, 전태일과 청계피복사태 문제 등에 참가하여 노동 운동에 입문. 제품 불매운동, 단식투쟁, 시위와 노동시 낭독, 선언문 발표 등으로 여념이 없었음.
오늘의 산문선집《환멸을 위하여》출간. 역주《시경(詩經)》출간.《한국의 지식인》출간. <불교란 무엇인가>를《법륜(法輪)》에 연재. <시와 시대>를 《독서신문》에 연재. 역주《두보시선(杜甫詩選)》 출간. 동화《갠지스 강의 저녁놀》출간.
1977
시집《입산(入山)》출간. 소설집《밤 주막》출간. 수필집
《세속의 길》출간. 오늘의 사상신서《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출간. 장편소설 《피안앵》을 개작,《산산이 부서진 이름》으로 출간. 민주구국헌장사건 주모자로 약 1개월 동안 정보부의 지하실에 구속, 그 뒤로 송광사에 유폐당함.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조태일과 함께 서울구치소에 수감. 구속 취하로 석방. 선임 변호사 김강영, 홍성우, 황인철 등. 나의 인세 및 가계 등의 관리를 담당형사가 맡음. 황숙자가 옥바라지. 출옥 뒤 자유실천문협 제3주년을 계기로 문학운동 확대를 위한 선언문 발표. 《대화》에 장시 <대륙大陸> 연재.
1978
<민주청년협의회>를 화곡동 자택에서 결성 지도, 윤보선, 문익환, 박형규, 성내운, 천관우, 송건호, 백기완 등과 고문이 됨. 민주통일 원칙 및 방안의 모색. 광주 서울 부산 등지의 많은 강연, 그 중에서 KSCF주최 4·19기념강연은 열렬한 반응.
자유실천문협과 백범사상연구소 공동주최로 '민족문학의 밤'을 개최, 성대한 운동이 되었음. 개회사 및 <갯비나리>를 친지 백기완 등이 특별낭송. 외유와 국회의원, 장관 등의 유혹과 협박 심각.
8·15를 맞아 유신체제에 대한 항의삭발. 다시 평화시장 남영나일론 해태제과 등의 노사문제와 동일, 상고, 원풍 등의 사태에 대한 대책문제로 노동 현장에 접근.
이 무렵 <똥> <쪼까니 딸들에게> <열다섯 살의 노동자 바우에게> <전태일> <장준하> 등의 근로자 격려시를 각 집회에서 발표. 이 때문에 당국의 제재가 있었음.
원주 집회사건으로 구금. 집은 늘 찾아오는 젊은이들로 메워짐.
한국인권운동협의회 발족, 송건호 등과 함께 그 부회장에 피임.
산문집《사랑을 위하여》, 《가난한 이를 위하여》, 평론집《진실을 위하여》출간. 민중연구 모임에 참가(서남동, 백낙청, 박현채, 김용복, 서인석, 현영학, 김윤수, 구중서). 일제잔재 청산, 분단극복을 지향하는 새로운 문학운동을 제기함.
시집《새벽길》 출간.
1979
평론집《지평선으로 가는 고행苦行》출간. 《한국문학전집 - 고은집》 출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약칭 국민연합) 결성, <민주회복국민회의>와 <한국인권운동협의회>의 지도층을 잇는 새로운 재야운동의 총본산이 실현됨. 함석헌, 김대중, 문익환, 이문영, 함세웅, 박형규, 이우정 등과 함께 참여, 문익환, 함세웅과 함께 중앙상임위 부위원장으로 핵심 역할을 함. 각종 인권문제에 대응. 집에서 세수할 겨를도 없을 때가 많았음.
이상화 영국 런던대 대학원으로 떠남.
YWCA에서 10일간 민족문학 특강. 《실천문학》창간 주도.
미 대통령 카터 방한 반대 데모 주도, 구속.
YH사태에 문동환, 이문영 등과 함께 대책 수립, 농성현장을 격려·지도. 신민당 총재 김영삼에게 여공들의 문제를 협의, 적극 찬동을 얻음. YH 김경숙 양 신민당사에서 절명. 국가보위에 관한 특조법 위반으로 문·이 등과 함께 서울구치소에 투옥. 선임 변호사 홍남순, 이돈명, 홍성우, 황인철, 박한상, 박세경, 등. 집은 오종우가 맡아줌. 옥중에서 10·26사태를 만남. 연말에 보석 형식으로 출감. 노동운동을 결심하고 하루 두 갑짜리 담배를 끊음. 감옥에서 귀의 고막 파열로 청각을 잃어서 그 때문에 귀와 코의 수술. 서울대 의대 김종선(金宗善) 집도.
1980
계엄하에 작품발표 엄금됨. 국민연합운동 적극화. 이때 한두번 작품발표를 위해서 '무단(舞丹)'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음. 소설집《산 너머 산 너머 벅찬 아픔이거라》출간. 대학신문들의 청탁에 호응. 출옥 직후 영등포에 노동학교 설립, 교장이 됨. 김대중, 문익환, 문동환 ,이문영, 이우정, 서인석, 서남동, 김종철, 정연주, 이돈명, 홍성우, 김용복, 한완상, 김찬국, 장기표, 신혜수, 서경석, 임명진 등이 주요 초빙 강사. 각 대학 강연.
5월 이후 내란음모죄, 계엄법, 계엄교사 죄목으로 조사, 재판. 문익환, 이문,영 예춘호 등과 육군교도소에 구속됨. 죽음 직전의 극한 상황 체험. 군법회의에서 20년 선고 받음.
1981
대구교도소 특별요시찰 정치범 수용 중 서울구치소로 이송되어 통합병원에서 파견된 김종선에 의해 다시 귀 수술, 위기를 넘김. 양복순과 친지들이 집을 맡았음.
1982
8·15기념으로 가석방. 국민연합 동참 예춘호를 비롯 성내운, 박태순, 염무웅, 김종철 등이 대구에 와서 내 신병을 인수.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한 건강상태였음. 여러 번의 옥중 단식으로 인한 악성 위궤양, 과민성 대장염 치료. 삭발 철회. 당분간 강연 불응.
1983
친구인 의사 장홍주의 시술로 어머니 양성종양 수술. 3년 만에 시를 발표. <조국의 별> <온돌>(세계의 문학) <4월혁명론> 발표. <함석헌 전집> 편집위원.
5월 5일 이상화와 결혼. 풍운의 독거생활을 끝냄. 식장은 수유동 안병무 교수 자택 정원. 주례 함석헌, 축도 문재린, 축시 문익환, 축사 이문영. 백낙청, 집전 리영희 교수 등으로 극히 제한된 친지 1 백여 명만을 초청함. 정보기관에서도 당일에야 알고 달려왔음.
아내는 결혼으로 대학 당국에서 면직 여부 대상이 되었으나 대학 담당 안기부 직원의 권고로 무사하게 넘어갔음.
결혼 직후 고려대 이문영 교수가 소개한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에 주거를 정함.
4년 만의 첫 강연 <민족통일의 역사적 과제>. 시를 잇달아 발표함.《고은 시전집》1, 2권 출간. 출판기념회를 준비가 당국에 의해서 제지당함.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0주년을 맞아 재창립, 후진에게 물려줌. 일본의 반핵평화운동대회의 초청이 있었으나 출국불허.
미국 기독교 기관에서 초청이 있었으나 출국불허. 연금이 다시 계속됨.
1984
김재준, 함석헌, 안병무, 박형규 등과 재야간담회 구성 실무를 맡음. 민통련 지도위원직 등은 자동적인 것임.
시집 《조국의 별》출간.
1985
서사시 <백두산>을 계간지《실천문학》에 연재하다가 강제 폐간당함. 창작과비평사 출판사 등록 취소에 맞서 투쟁. 월간 《마당》에 <겨레와 노래> <어린 시절>을 연재.
딸 차령이 태어남. 5월 12일.
미국 일본 등지의 초청여행 불허됨.
1986
<만인보(萬人譜)>를《세계의 문학》에 연재함. 전작으로 옮겨 1, 2권을 출간.《창작과비평》강제폐간 뒤 이름을《창작사》로 연명할 때였음. 시집 《전원시편》,《시여 날아가라》,《가야 할 사람》, 평론집《문학과 민족》출간. 산문집《고난의 꽃》출간.
일본 펜클럽과 서독 하이델베르크대 등지의 2개 대학 강연 초청이 있었으나 여권이 발급되지 않음. 당국에 의한 연금상태 자주 있었음. 집 주위는 항상 사복 경찰관 수명이 감시. 제13회 한국문학작 가상 수상식에도 연금에 동원된 경찰 중 3명과 함께 동행하여 상장만 받고 바로 귀가 조치됨.
1987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상임공동대표(박형규, 김승훈, 이돈명 등과). 6월 항쟁에 적극 참여. 최루탄가스로 흉통이 잦았음. 동대문, 세운상가 그리고 서울역 광장 시위에 참가하였음.
박종철, 이한열 군 추도회 주관하고 추도시 낭독. 서울 시청앞 광장 2백만 시민집회에 앞장섰으나 그것을 청와대로까지 이끌지 못했음. 이른바 대통령 직선제의 6·29선언에 이렇다 할 정치적 대응없이 대통령선거 국면을 맞았음. 재야가 여러 갈래로 찢어지는 것을 보고 비애. 저술에 몰두함. 대학 등 강연 계속.
당국으로부터 완전봉쇄의 연금조치를 자주 당하고 어느 때는 사전에 이를 피해서 떠돌이 생활로 보내기도 했음.
버클리대 초청으로 미국과 캐나다에서 강연과 여행 2개월(1회용 임시 여권을 발급받아). 그러나 일본의 국제평화대회 초청에는 정작 일본 정부로부터 배일(排日) 사상가로 낙인 찍혀 비자를 받지 못했음.
대하장편서사시《백두산》시작, 1, 2권 출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해체하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 회장 김정한, 백낙청과 함께 부회장이 됨.
《만인보》3, 4, 5권. 출간.
1988
《만인보》6권, 시집《네 눈동자》, 《나의 저녁》, 《그 날의 대행진》, 평론 《잎은 피어 청산 되네》출간. 《고은전집》1, 2, 3, 4권을 출간하면서 매월 2권씩 계속해서 간행함.
제3회 '만해문학상' 수상.
여덟 번째 초청인 일본 이와나미(岩波) 출판사 초청이 당국의 출불허로 또 막히고 함께 초청된 백낙청을 통해 강연 원고가 대독되었음.
다시 일본 초청을 받아 그곳 2백여 지식인과 작가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강연과 대화를 계속함. 일본 사회당 당수 도이(土井) 위원장. 작가 오에(大江健三郞), 야스에(安江良介), 이회성(李恢成), 노마(野間宏) 등과 교유. 일본 TV의 취재 계획에 따라 오키나와 조선인 희생현장 참배.
1989
<남북작가회담 추진위원회>위원장에 피선, 남북작가회담 제안. 판문점 회담을 위해서 회담 대표와 동료들이 가다가 연행 되었음. 일단 귀가조치 뒤 다시 연행하여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시킴. 서울구치소. 국제펜클럽 등 여러 나라의 석방운동, 구속항의에 의해 2개월 만에 보석 석방되어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의 1심, 2심 재판이 진행됨.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창립, 초대 공동의장 피선으로 의장 수락연설. 해방 이후 처음으로 진보적 예술인의 결집체가 이루어졌음.
《만인보》 7, 8, 9권. 산문집 《고은통신》, 《얼마나 나는 들에서 들로 헤매었던가》 출간.
1990
시집《아침이슬》, 《천년의 울음이여 사랑이여: 백두산 서정 시편》,《눈물을 위하여》. 평론집《황혼과 전위》출간. 납월북 예술가 산문집 전 3권 엮음.
민족문학작가회의 의장.
1991
민예총 의장 연임한 뒤 사임. 문학 저술활동.
시집 《해금강》, 《선시 - 뭐냐》, 《거리의 노래》, 《백두산》3, 4권, 장편소설《화엄경》출간.
<중앙문화대상>수상.
1992
호주 시드니대 한국학과에서 <한국문학의 오늘> 강연 및 호주 각 지역 여행.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초청, <한반도의 꿈> 강연.
장선우 감독, 김형균 등과 인도, 네팔, 스리랑카 여행.
시집《내일의 노래》, 소설《그들의 벌판》,《내가 만든 사막》 출간.
1993
김영삼 정부에 의해 리영희 교수 등과 함께 사면 복권됨. 처음으로 복수여권을 발급받음.
미국 미시간대 국제대학 주관 국제대회에 리영희교수와 함께 강연.
경향신문사와 MBC 후원, 창비, 동아출판 협찬의 <시력詩歷 35년 고은 문학의 밤> 문학행사. 연강홀. 기념집 《고은문학앨범》(웅진) 출간.
경향신문에 자전소설 <나의 삶 나의 산하> 장기 연재, 광주일보에 <방랑시인> 연재.
서사시《백두산》후반부 5, 6, 7, 8권 출간. 시집《아직 가지 않은 길》, 에세이집《광야에서의 사색》, 여행기《인도기행》, 연구서《내가 가는 금강경》, 자서전《나, 고은》1, 2, 3권 출간.
아내 이상화, 딸 차령이와 함께 첫 유럽여행.
1994
경기대 대학원 석좌교수로 초빙됨 (1994-1998).
제1회 대산문학상 시부문 수상.
대하서사시《백두산》5, 6, 7권을 출간하면서 완성.
1995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초청 시낭독 및 강연.
프랑스 문화성 초청, 시낭송 및 문예지 고은특집.
시집《독도》. 소설 《정선아리랑》, 《소설 김삿갓》1, 2, 3권, 소설《선(禪)》1, 2권.
자서전《나의 청동시대》.
1996
호주 작가 페스티벌 참석. 고은 시선《아침이슬》영어판 출간. 시드니 TV 특집 프로 '한국시인 고은'에서 대담 및 시낭독.
일본 오사카 '중심 21' 초청강연 및 시낭독.
독일 주어캄프사 주최로 프랑크푸르트, 뮌헨, 베를린 등 5대 도시 순회 시낭독. 독일 주요신문들 인터뷰.
네덜란드 로테르담 국제시인대회 참석.
시집《어느 기념비》, 대하연작시《만인보》10, 11, 12권 출간.
1997
버클리대에서 미국 시인 게리 스나이더와 함께 시낭독. 버클리대에서 미국 계관시인 로버트 하스와 시낭독.
멕시코 <과달라하라 북페어> 문학행사에서 시낭독 및 인터뷰.
시집 《어느 기념비》,《만인보》13, 14, 15권 출간. 프레스 센터에서 창작과비평사 주최《만인보》15권 출판기념 '70년대 사람들' 행사.
산문집《살아있는 광장에 서서》, 동시집《차령이 노래》, 동화책《나는 시골 삽살개에요》
40일간 티베트 수미산 순례 중 어머니 별세(향년 84세).
1998
중앙일보 주관으로 북한 방문, 15일 간 북한 각지 문화와 자연 시찰. 북한에서 쓴 시를 분단 이후 최초로 팩스를 통해 직접 남한에 전달, 신문에 실림.
시집《속삭임》출간.
프랑스 정부 초청, 파리 <작가의 집>에서 미셀 드기, 알랭 주프르와와 시낭독, 이브 본느프와와 대담.
<산하여 나의 산하여:고은 시낭독회>가 예술의 전당에서 2일간 공연됨.
<만해대상> 시부문상 수상.
정선 명예군민으로 추대됨.
1999
미 하버드대 옌칭 연구교수 및 버클리대 방문교수로 가족과 함께 1년간 도미, 시론 강의.
한국 뮤지컬 대본 <백범 김구>집필.
하버드대 페인홀에서<고은의 밤>행사.
시카고대에서 미국 10대 시인의 하나로 시낭독 및 강연.
미 UCLA, 버클리대, 하와이대, 캐나다 요크대학, 캘거리 등지에서 강연과 시낭독.
뉴욕에서 '고은의 밤' 행사.
멕시코에서 파블로 네루다 기념 시낭독회 중남미 시인들과 참가.
시집《머나먼 길》, 북한여행기《산하여, 나의 산하여》, 시평론《시가 있는 아침》, 소설《수미산》1, 2권 출간.
2000
분단 55년 휴전 50년 만의 남북공존을 세계에 선포한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의 일원으로 방북, 기념만찬장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시를 낭독.
스웨덴 스톨홀름대 한국학 포럼 참석 및 <요테보리 도서전시회>에서 강연 및 시낭독.
미워쉬와 쉼보르스카야가 후원하는 폴란드 크라카우 세계시인축제에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망명시인 베이 다오와 함께 참가. 쉐이 머스 히니, 로버트 하스 등과 각종 시 행사에 참여.
시집《남과 북》,《히말라야 시편》출간.
제 1회 대산 국제문학제에서 기조연설.
2001
유네스코 주최로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세계 시인의 날'에 초대받아 아테네, 델피, 올림피아 등지에서 시낭 및 토론.
독일 브레멘 세계시인대회에서 시낭독 및 강연과 인터뷰.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열린 <세계 시 아카데미>창립대회에 회원으로 초청받음.
남미 콜롬비아 국제시인대회에 초청받아 각지 순회 시낭독.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동양박물관 초청강연 및 요테보리 국제 도서전 시 축제에서 시 낭독.
미국 시인 게리 스나이더 초청으로 UC 데이비스에서 시낭독 및 강연. UC 버클리와 UC 산타크루즈에서 시낭독 및 강연.
일본 도쿄 국제도서전시에서 후지와라 출판사의 포럼 발제자로 참가. 일본 5대 일간지와 인터뷰.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대 초청, 시낭독 및 강연.
시집《순간의 꽃》, 수필집《길에는 먼저 간 사람의 자취가 있다》출간.
2002
체코 '프라하 작가 축제'에 초청받아 시낭독 및인터뷰, 현지 신문에 <시와 혁명> 기고.
러시아 바이칼 호수에서 열린 한국 문예창작학회 국제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 및 시낭독.
필리핀 마닐라에서 필리핀 문학예술센터가 주최한 제1회 '환태평양 시인축전'에 13개국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 발제 및 시낭독.
백낙청 편 고은시선《어느 바람》출간.
전 38권의 《고은접집》출간 (김영사)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총장의 초청으로 시낭독 및 문학강연.
프랑스 정부 초청의 한국문화축제 행사로 파리 몰리에르 극장 시낭독.
정부로부터 은관 문화훈장 받음.
시집《두고 온 시》, 《늦은 노래》, 《젊은 그들》출간.
2003
일본 오끼나와에서 열린 문학과 환경 국제회의에서 발제 및 미국 시인 게리 스나이더와 시낭독.
프랑스 빠리 제 7대학 동양학 연구소 주최 아시아 축제에서 시낭독, 강연 등.
이라크 한국군 파병 반대 작가 시위.
스웨덴 동양박물관 주최 현대한국문학 심포지엄에서 발제강연 및 시낭독.
일본 도쿄 국제 도서전의 한일 지식인 포럼에서 기조연설 및 기자회견 등.
만해재단 주최 국제평화시인대회 대회장으로 세계 20여개국에서 온 시인들의 문학축전을 금강산과 서울에서 진행.
제 3회 베를린 문학제에 초대받아 강연 및 시낭독.
군산에서 시비 '삶' 제막행사.
2004
<한국문학평화포럼> 회장.
미국 워싱턴의 폴저 쉐익스피어 도서관에서 시낭독, 하버드대학과 위싱턴대학에서 시낭독.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여행.
스페인 살라망카대학에서 스페인 시인 안토니오 꼴리나스와 시낭독.
오페라 대본 <단군>(일명 개천<開天>) 집필.
스페인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만인보》 출간 기념 시낭독.
서울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고은 문학의 밤' 개최.
스페인 무르시아 세계시인대회와 꼬르도바 도서전에서 시낭독.
단재상 수상.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제 1회 한이문학포럼에서 강연 및 시낭독.
《만인보》16-20권 출간.
2005
한반도 분단 이후 최초의 한국어 공동사전 편찬을 위한<겨레말 남북 공동 편찬위원회>상임위원장에 취임.
독일 라이프치히 도서전에서 강연 및 시낭독.
일본의 마쓰야마대학과 고베 등 여러 도시에서 강연, 대답, 인터뷰 등.
장편 판소리 대본 <초혼(招魂)> 집필.
제 3회 베를린 세계 시인축제에서 대담, 시 낭독, 시 녹음 등.
노르웨이 몰데에서 열린 뵨슨문학제에서 강연, 시낭독, 인터뷰 등. 이어 오슬로 대학에서 강연과 시낭독.
독일 베를린문학제에 초대받아 강연과 시낭독.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주빈국 대표로 개막식의 '문학연설'을 하고 여러 행사에서 시낭독, 인터뷰 등.
노르웨이의 유일한 문화훈장인 뵨슨 문화훈장 받음.
2005
제 2회 대산 국제문학제에서 기조연설.
2006
<겨레말 남북 공동 편찬위원회>의 정례회의를 위해 수차례 북한 방문.
한반도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 백두산에서 남북작가 300여명이 참가한 문학축제에 남측 대회장으로 시낭독.
이탈리아어판 《순간의 꽃》 출판 기념 시행사를 로마, 피렌체, 밀라노, 포르미아 등 4개 도시에서 개최, 여러 인터뷰와 시낭독.
프랑스 보르도대학과 빠리 도서전에서 강연 및 시낭독.
미국 여러 도시에서 영어판 시집 《삼거리 주막》 출판 기념 강연과 시낭독.
미국 PEN의 뉴욕 국제문학제에서 시낭독, 알렌 긴즈버그 50주기 기념식에서 시낭독.
이탈리아 빠르마 세계문학제에 초대받아 강연, 대화, 시낭독.
미국 제랄딘 다지 국제 시축전에 '특집시인'으로 초대받아 강연, 대화, 시낭독. 이어 하버드대학과 워싱턴대학에서 시낭독.
스웨덴의 문학상 시카다상 수상.
《만인보》 21-23권. 시집 《부끄러움 가득》 출간.
2007
몽고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제 1회 한몽 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 및 시낭독.
홍콩에서 개최된 국제 펜 아태지역회의의 특별손님으로 초대받아 시낭독.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ARCO 기념행사에서 인터뷰와 대담 및 시낭독, 말라가대학에서 강연과 시낭독.
서울대 초빙교수.
일본 도쿄에서 열린 <21세기 지식인>이 주최한 제2회 국제 콜로키엄에서 기조연설, 대담과 인터뷰 등.
일본 가나자와에서 개최된<문학과 환경학회>한일공동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 및 시낭독.
영랑문학상 수상.
만해축전 대회장
한국에서 개최한 제1회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 페스티벌(AALF)에서 기조연설 ‘나는 제 3세계라는 이름을 폐기한다.’
통일부 통일고문. 『겨레말큰사전』 남북편찬위원회 이사장으로 남북한에서 수차례 회의 주재.
노르웨이어판 선시 『뭐냐』 출간.
한러문학제에 참석, 모스코바 레닌도서관에서 시낭송.
북경과 상해에서 열린 한중문학제에서 강연 및 시낭송.
《만인보》 24-26권, 산문집《우주의 사투리》출간.
2008
독일 베를린의 세계문화의 집에서 열린 아시아문학제에서 시낭송과 대담.
괴팅겐, 에르푸르트, 라이프찌히에서 독일어판 시집 『바람 부는 날』 시낭송회.
영국 런던의 한국문화원 주최 첫 문학행사로 시낭송회.
캐나다 토론토에서 그리핀 문학상, 평생공로상 수상.
유심문학상 수상.
『인사이클로피디어 브리태니카』 2008년 연감에 등재됨.
만해국제문학제 대회장으로 기조연설.
시인 등단 50주년 기념 시집『허공』을 출판하고 첫 그림 전시회를 가짐.
50주년 기념행사는 9월부터 12월까지 많은 대담과 인터뷰, 중앙대, 경희대, 단국대, 서울대에서 포럼과 세미나, 서울, 대전 대구에서 기념 강연 및 시낭송회 등으로 이어짐. 축하행사의 하나로 주한 외국대사 10명이 10개국어로 ‘고은 시 낭송회’를 가짐.
예술원상 수상. 『겨레말큰사전』남북편찬위원회 이사장으로 계속 활동.
이라크와 이집트의 대표 주간문예지 『알 아디브』와 『알 아라비』에 시 특집.
단국대 석좌교수.
삼척시 명예시민으로 추대됨.
2009
마키즈 명사 사전(Marquis Who's Who)에 등재됨.
스페인에서 시 ‘어떤 기쁨’ 한 편의 원본과 번역본을 나무상자에 담은 한정본시집 출간.
『만인보』 마지막 4권 집필 완료.
시인 등단 50주년을 기념하는 시선집 『50년의 사춘기』(김형수편) 출간.
산문집 『개념의 숲』 과 『오늘도 걷는다』 출간.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개최된 국제 시축제에서 시낭송, 대담, 강연 등. 때 맞춰 출간된 폴란드어 시선집 『소나기』가 저명한 출판사 즈낙(Znak)에서 출간되어 현지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음.
이탈리아어 시선집 『노래섬』과 스페인어 시선집 『천년의 말라가』 출간.
2010
『만인보』의 마지막 4권을 출간하면서 1980년 감옥에서 구상한지 30년, 집필 을 시작한지 24년 만에 총 30권에 5600명의 이름을 올리면서 4001명을 노 래한 대하 인물시집을 완성함. 11권으로 된 특별 양장본 『만인보』 전집도 별 도로 출간. 출판 기념 ‘『만인보』 국제 심포지움’에 프랑스에서 시인과 학자가 참석해 발제와 발표를 했고 이어 대규모 출판기념식 열림. 미국의 전 계관시 인 로버트 하스는 “영어권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흥분하게 만드는 이 시집의 시들은 시인이 세계에 주는 선물이며, 그 모든 인간성과 폭력에 대한 기막힌 20세기의 초상이며, 한국 국민의 생명력에 바치는 찬사이다” 라는 축하 메시 지를 보내왔음.
『만인보』가 제 7회 광주비에날레의 주제로 선정되어 미국 『뉴욕 타임스』에 보도됨.
미국 동부의 스미스 컬리지와 로스앤젤레스의 UCLA대학 등지에서도 시낭송회, 인터뷰 등.
이탈리아 베니스 시 주최 국제 시 축제인 제 4회 ‘문화의 교차로’에서 시낭 송 등. 베니스대학 강연.
이탈리아의 밀라노, 플로렌스, 로마에서 이탈리아어 시선집의 북 투어. 매 도시에서 많은 이탈리아 시인들이 헌정시를 낭송. 이 시선집은 이탈리아의 ‘카마이오레 문학상’ 국제부문에서 3권의 최종 후보 중 하나로 오름.
산문집 『나는 격류였다』 와 『나의 삶 나의 시: 백년이 담긴 오십년』 출간.
『타임스』 아시아판에 특집 기사가 실리면서 ‘현존하는 아시아의 가장 위대 한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음. 『아이리쉬 타임스』에도 특별 기사로 소개됨. 호주의 방송국 ABC가 영어판 『내일의 노래』를 중심으로 특집 방송.
단국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
서울에서 개최된 제 23회 IFURO(세계산림학 대회)에서 기조연설.
터키 이스탄불에서 개최된 제 2회 WALTIC(작가 번역가 회의) 에서 기조연설.
베트남 하노이에서 시집 출판기념 시낭송회.
1910년 한일합병 100주년을 맞아 합병조약 무효 선언 운동에 참석.
2011
미국 당대 예술 프로젝트에서 국제적 작가에게 주는 평생 공로상 ‘아메리카 어워드’ 2011년도 수상자.
전북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 수여.
시 ‘햇볕’이 호주의 한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림.
프랑스어판 『속삭임』출간
독일어판 『순간의 꽃』 출간. 이 시집은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독서 진흥 연구소’의 1분기 ‘최고의 리스트’ 에 “고은은 우리 시대 위대한 서정 시인들의 샤먼이다” 라는 평과 함께 선정, 한국번역도서로는 최초의 도서.
제 23회 체코 프라하 국제도서전에 국제 손님으로 초대되어 시낭송와 인터 뷰 등.
제주도 특별자치도의 명예도민증을 수여 받음.
세계 시 아카데미’로부터 “세계 시에 기여한 공로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명예 위원회”에 만장일치로 지명됨.
터키어판 시집 『만인보』와 『내일의 노래』가 수도 앙카라에서 출간됨.
아시아 스토리텔링 전통 국제 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
프랑스 빠리와 액상 프로방스(액스와 아비뇽)에서 프랑스어판 시집 『속삭임』과 『만인보』의 출판기념회 행사.
영어판 『히말라야 시편』과 단시 모음집 『시간의 이쪽』이 LA와 뉴욕에서 각각 출간됨.
2012
‘인간 상록수’로 추대됨.
광주광역시 명예시민으로 추대됨.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에서 열리는 북구 최대의 문학제에 초대되어 기조 강연 및 노르웨이 외상 과의 대화, 시낭송 등.
‘아시아 문화 포럼’에서 기조연설.
‘세계 아리랑 축전’ 집행 위원장, ‘5월 문학 총서’ 출간 간행 위원장.
영국에서 열린 제 24회 올브라 시축제에 초대되어 대담과 시낭송을 함. 이어 영국에서 출간 된 시선집 『일인칭은 슬프다』의 북투어를 런던, 옥스포드, 케임브리지에서 가짐.
친지들이 70세 생일을 기념해 꾸몄던 시선집 『어느 바람』을 80세 생일을 맞이해 대폭 증보한 『마치 잔칫날처럼』 출간.
두 권의 산문집 『두 세기의 달빛』과 『바람의 사상』 출간.
미국 시인 로버트 하스의 산문집 What Light Can Do에 ‘고은과 한국시’가 실림.
2013
3월부터 6월까지 베니스에 체류하면서 카포스카리대학으로부터 명예 펠로우십을 받고 세 차례 한국시 특강을 함. 명예 펠로우가 된 기념으로 베니스의 유서 깊은 극장 ‘라 페니체’에서 시낭송. 시칠리아의 여러 도시와 라벤나 등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를 여행. 선시집 『뭐냐』 이탈리아어판 출간. 밀라노의 저명한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이 최초로 주최한 한국학 세미나에서 발표하고 단독 시낭송회. 이탈리아의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등 다양한 매체와 인터뷰를 하고, 비첸차와 로마에서 열린 국제문학제에 초대받아 시낭송 등.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로 여행 가서 밤새 시의 유성우(流星雨)가 쏟아지는 특별한 시적 체험을 함.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남아프리카공화국 제1회 국제시축제에 초대받아 시낭송과 패널, 인터뷰 등. 프랑스 낭뜨에서 단독 시낭송회. 80회 생일을 기념하여 독일의 한 라디오가 ‘하나의 나라, 하나의 생애’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독일의 대표적 신문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너 자이퉁’이 80회 생일을 기념하는 기사를 씀. 중국 칭하이호 국제시축제에 초대받아 시낭송, 인터뷰. 결혼과 함께 만 30년을 살았던 안성집을 떠나 수원시의 초청으로 광교산 자락으로 이주, 새로운 수원 시대 개막. 오랫동안 꿈꾸었던 아내와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을 실현하며 3주간 러시아 여행. 단국대와 수원시 후원의 제2회 국제작가 페스티벌을 조직하고, 시낭송 등을 함. 『만인보』가 체코어로 프라하에서 출간. 607편의 시가 담긴 1,013면의 단행본 시집 『무제시편』(창비)을 출간, 단행본 신간으로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두꺼운 시집에 될 이 시집의 수록작 대부분은 유럽에 체류하며 여행한 6개월 동안에 씌어졌음. 영국 BBC 라디오(BBC Radio 4)의 제작팀이 내방하여 『만인보』 특집으로 ‘한국의 민중시인’이라는 특집 다큐를 제작하고 12월에 방송함.
2014
미얀마의 여러 도시를 여행. 수원시의 SK아트리움 개관 기념 단독 시낭송회. 공초 오상순 문학상 수상. 런던의 빅토리아 & 알버트 뮤지엄의 라파엘 갤러리에서 시낭송회를 하고, 베를린 시축제에 초대받아 시낭송과 대화 등의 행사를 함. BBC 라디오 4에서 방영하는 시낭송 프로그램에 시 「고향」이 낭송됨. 마케도니아의 ‘스트루가 국제시축제’가 수여하는 유서깊은 문학상 ‘황금화관상’의 수상자로 스트루가 시축제에 참석, 한국어-마케도니아어-영어 3개 국어로 만들어진, 이 시축제 역사상 가장 두꺼운 740면의 시집을 헌정받고, 계관시인으로서 시낭송과 인터뷰 등 많은 행사를 진행함.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평화친선대사’로 위촉됨 인천에서 열린 제17회 아시안 게임 개막식에서 축시를 낭송함.
런던의 사우스뱅크 센터의 시전문가들이 선정한 ‘현대의 가장 위대한 사랑시 50’편에 시 「강설」이 선정되어 런던 시축제에서 현지 시인들이 낭송함. (『가디언지』 7월 2일자 보도)
유네스코 코리아의 ‘평화친선대사’로 위촉. 넬슨 만델라를 추모해 독일에서 출간된 책에 시와 인터뷰가 실림.
미국 시카고 소재 해롤드 워싱턴 도서관에서 ‘시 재단’ 초청으로 단독 시낭송회를 하고, 일리노이 대학 시카고 캠퍼스에서 강연. 하와이대학교 한국학 센터가 주관한 ‘고은 심포지엄’에서 강연과 시낭송회.
이탈리아 페스카라에서 수여하는 ‘노르드수드 국제시문학상’ 수상. 이후 포르미아와 살레르노에서 이탈리아어판 선시집 『뭐냐』 출간 기념 시낭송회.
세계적인 화가 2인의 그림과 협업한 프랑스어 시화집 『매혹』이 프랑스 도서제작자에 의해 각12권 한정판으로 기획되어 니스 도서전에 출품됨.
넬슨 만델라를 기념해 독일에서 출간한 책에 시와 인터뷰가 실림.
그리스어판 선시집 『뭐냐』 출간.
공초문학상, 제1회 시와시학 대상 수상.
중국에서 출간한 『세계 현대시 110수』에 ‘나무의 앞’이 수록됨.
2015
한신대에서 명예문학박사 받음.
유네스코가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제정한 ‘행복의 날’(3월 20일)을 기념해 발간한 사화집 『행복: 기쁨의 나무』에 시 수록.
일본 후지와라 출판사 초청으로 토쿄에서 ‘동아시아에서 세계를 본다’라는 제목으로 특별강연. 교토에서 윤동주 서거 70주기를 기념하는 행사에서 특별강연.
스위스의 제4국어인 로만쉬어로 시 3편이 번역되고, 『만인보』의 시 1편이 칠레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 아르헨티나에서 한국인 이민 50주년 기념으로 발간된 한국시 사화집에 시 3편 수록.
중앙일보 주최 해방 70주년 기념 통일 염원 ‘시민 오디세이’에 참가, 일주일 동안 북중 경계지역 여행.
2014년 스트루가 시축제의 황금화환상 수상을 기념해 마케도니아 국영TV가 제작한 5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가 수도 스코페의 극장 씨네마테크에서 사시회를 가짐.
영국의 레드버리 국제 시축제에 초대받아 시낭송, 런던의 한국문화원에서 시낭송, 그후 스위스 엥가딘의 여러 도시를 여행.
심훈문학대상 수상.
『만인보』 11-20권에서 선하고 번역한 202편이 영국에서 『만인보: 평화와 전쟁』으로 출간됨. 프랑스에서 『순간의 꽃』과 『히말라야 시편』 출간. 스페인어 시선집 『죽은 시인들과의 시간』 출간.
고은 문학의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연구를 위해 국내외 60여명의 대학교수, 학자, 연구원, 번역가
들이 발의해 〈만인보 아카데미〉와 〈고은학회〉 창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이탈리아 밀라노 소재 암브로시아나 아카데미의 아시아학회 정식회원으로 임명되고 (밀라노 대주교의 임명) 아시아학회 연례 국제회의에 참석해 강연.
프랑스 빠리에 있는 ’시의 집’과 ‘라틴아메리카의 집’에서 각각 시낭송. FIAC이 주관해 프랑스 국립미술원에서 열린 미학 심포지엄에서 발제강연.
빠리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에서 유네스코 창설 70주년과 한반도 분단 70년을 동시에 기념하는 단독 시낭송회를 양방언의 음악과 함께 ‘평화에 목마르다’라는 제목으로 가짐.
프랑스 마르세유의 ‘국제시인세터’에서 프랑스어판 『히말라야 시편』의 출간을 기념한 단독 시낭송회를 가짐.
남북공동 편찬위 이사장을 맡고 있는 〈겨레말 큰사전〉 회의를 위해 북한 금강산에 감.
고은의 예술을 지지하는 80여명의 발기인에 의해 〈고은재단〉 설립됨.
2016
중국어 번역 시선집 『봄날을 고이 묻었어라』와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50년의 사춘기』 그리고 『히말라야 시편』이 베이징과 후난에서 각각 출간됨.
베트남어 『만인보』 출간.
루마니아의 부카레스트 국제시축제에 ‘주빈’으로 초대받아 루마니아어로 시선집 『죽은 시인들과의 시간』의 출판기념 단독 시낭송회를 하고 다른 시낭송회를 가짐.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열린 국제시축제에 초대받아 시낭송회에 참석. 중국어로 출간된 『히말라야 시편』 출판 기념 세미나에 참석하고 시낭송을 함.
제 20회 슬로베니아 시축제 〈시와 포도주의 날들〉에 ‘주빈’으로 초대받아 시낭송과 인터뷰를 하고 슬로베니아어 시선집 『허공에 쓰다』의 출간 기념회를 가짐.
미국 워싱턴 디씨에 있는 의회도서관 초청으로 시낭송회를 하고, 조지워싱턴대학에서도 시낭송회를 가짐.
타이페이 국제시축제에 ‘특집시인(專制大師)’으로 초대되어 『만인보』 세미나와 시낭독회를 가짐. 시 ‘나무의 앞’에 대만 작곡가가 곡을 붙인 노래가 개막식 축가로 공연됨.
『무제시편』 이후 3년 만에 시집 『초혼(招魂)』 출간.
중국 쉔젠(堔川)시 주최 시축제와 광저우(廣州)에서 시낭송과 여러 인터뷰를 함. 쉔젠에서는 현지 작곡가가 시 ‘소년의 노래’를 작곡해 공연함.
6, 25전쟁시 절반이 폭파된 임진각의 다리의 복원을 염원하는 기획에 참여, 끊어진 다리 이름을 ‘내일의 기적소리’라 짓고 시 한편을 헌정.
2017
이탈리아 로마재단이 수여하는 ‘국제시인상’ 수상. 시상식에 참석, 수상연설.
스웨덴의 일간지 스벤스카 도블라뎃, 다겐스 니헤터, 프랑스의 리베라시옹과 인터뷰, 모두 특집으로 실림.
교보 합정동점에 시비(詩碑) 제막, 제주 강정마을에 베트남 시인과 함께 평화시비 제막. 대산문화재단 주최 국제문학포럼에서 기조연설, 미국시인 로버트 하스와 함께 시낭송.
10여년에 걸쳐 집필한 심청 이야기로 만든 서사시 『청』 완성, 아마도 서사시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1000여쪽에 이르는 원고를 탈고, 출판사에 넘김.
스웨덴에서 번역시선집 『흰나비』, 아이슬란드 시선집, 벵골어 시선집 『해골의 노래』, 프랑스어 시선집 『일인칭은 슬프다』, 스페인어 시집 『일인칭은 슬프다』 『순간의 꽃』, 몽골어 시집 『상화시편』과 『고은 시선집』 출간.
서울 은평역사한옥박물관에서 한국문학 번역전시 기획의 한 부분으로 ‘고은 특집’이 전시됨.
서울시 서울도서관 안에 ‘만인의 방’ 개설.
프랑스 빠리 소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알랭 들리센 교수가 2018년도 학기에 『만인보』 세미나 주최.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서 개최한 제1회 국제문학축제 조직위원장, 단독 시낭송회.
카이스트(KAIST)에서 초빙교수로 위촉.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번역시집 『만인보』 출간 기념식에 참석, 베트남 민예총으로부터 기념패와 매달을 받음.
2018
단시 217편 모음집 『어느 날』 출간.
직장 선종 수술 두 번, 그로 인해 몇 개의 해외 초대 일정 취소.
성남시 분당으로 이사.
멕시코시티 시정부 주관 ‘멕시코시티 시축제’가 수여하는 ‘2018 뉴골든에이지 상’의 수상자로 선정됨. 수상 기념으로 사화집 『늦은 노래』가 현지 시인들의 합작 번역으로 시전문 출판사 ‘씨르꿀로 데 뽀에지아’에서 출간되자 현지 언론에 대서특필됨. 시축제 기간 중 시장의 참석 하에 열린 시상식 후 축하행사로 단독 시낭송회. 그밖에도 여러 시낭송에 참석.
이탈리아의 대표적 출판사 봄삐아니가 전세계 현대시에 헌정하는 새로운 시집출간 기획에 『만인보』를 포함, 두 권으로 출간 예정.
‘이름 짓지 못한 시‘가 스리랑카의 언어인 신할라로 번역됨.
2019
뉴델리에서 열린 라잔재단 주최 ‘아시아 시 비에날레’에 초대받아 시낭송, 대화 ‘진실 후 시대의 시의 진실’에서 발언. 이후 인도의 몇 곳을 여행.
인도의 국립 네루대학교(Jawharlal Nehru University) 한국학 연구소에 초대받아 교수들과 대학원생들에게 강연.
슬로베니아어 사화집에 시 ‘속삭임’ 포함됨. 이 사화집은 지난 50년 동안 쓰여진 전 세계의 대표적인 시인들의 시 100편을 모은 시집으로 빠블로 네루다, 테드 휴즈, 토마쉬 살라문, 토마스 트란스트로뫼르 등이 포함됨.
한국문학 특집을 기획한 독일의 국영 라디오 ‘도이치란드 라디오’의 라디오 저널리스트의 인터뷰를 위한 내방. 특히 독일어로 번역된 『순간의 꽃』의 시편들을 특집에 소개한다고 함.
저명한 스위스의 조각가 노트 비탈(Not Vital)의 내방. 오랫동안 『히말라야 시편』을 좋아한 나머지 그중 3편을 모국어인 엥가딘 지방의 로만쉬어로 직접 번역해 포함시킨 자신의 시집 출간을 기념한 방문. 이 예술가는 진작에 『히말라야 시편』에 들어 있는 시에 영감을 받아 나무 형상의 13미터짜리 청동조각품을 제작해 스위스에 있는 자신의 성(城) 안 마당에 세웠음. 첫 만남 후 돌아가 고은의 초상화를 특유의 검은색 유화로 그림.
2016년에 이어 제 10회 부카레스트국제시축제에 초대받아 시낭송을 하고 ‘작가와 권력의 문제’를 다룬 콜로키엄에서 발제.
루마니아 국제시축제 행사 후 어떤 계기가 있어 1년 반 가까이 ‘떠나버렸던’ 언어가 돌아오기 시작하며 다시 시를 쓰기 시작, 그 이래 수많은 시를 쓰고 있다.
한국의 이념 갈등의 희생자가 된 한 인물의 실화에 바탕을 둔 장편 서사시 『칼바람 속에서』를 집필, 출간함.
아이슬란드로 3주간 가족여행.
카자흐스탄의 수도 누르 술탄에서 열린 ‘제 1회 아시아 작가포럼’에 초대받아 개회식에서 기조 연설함. 이어 여러 매체와 인터뷰.
가보지 않고 썼던 시 ‘아리랑’에 나오는 카자흐스탄 알마티로의 여행, 천산산맥도 뒤늦게 올라감.
이란 태생으로 프랑스 소르본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인도의 한 대학에재직하고 있는 시인 라민 자한베글루의 요청으로 긴 대화 프로젝트를 시작함.
2020
대만 타이페이에서 대만어 시집 『초혼』 출간.
중국 시인이며 일본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텐 위안이 일본의 문예지 『북방문학』에 고은에게 바치는 헌시를 발표, 그후 그 시에 대한 서평도 나옴.
계간 『문학 역사 철학』지에 단시 26수 발표.
라민교수와 반년 넘게 진행했던 ‘고은과의 대화’ 프로젝트가 끝남.
요르단 시인 타흐신 알캍이브가 세계적인 주간지 Publishers Weekly의 아랍어판에 실릴 목적으로 기획한 긴 인터뷰 요청에 응해 대화를 시작.
우즈베키스탄의 고도(古都) 사마르칸트에 대해 쓴 시 ‘사마르칸트 송가’가 사마르칸트에서 발행되는 주간신문에 특집으로 소개됨.
인도 타밀지방의 의대생들이 영어본에서 짧은 시를 골라 『24편의 단시』 라는 제목의 타밀어 시집을 자비로 출간함.
『실천문학』 창간 40주년을 맞아 창간 무렵을 회고하는 글을 씀. 『실천문학』은 고은이 그 이름을 짓고 출판을 시작했음.
2021
『고은과의 대화』가 인도의 출판사 〈오리엔트 블랙 스완〉에서 출간됨.
인도의 시축제, 제 14회 크리티아 국제시축제에 초청받아 개막식에서 시 낭송. 낭송한 시들은 『더 크리티아』 라는 문예지에 실릴 예정. 이후 ‘크리티아 국제시축제’ 자문위원으로 위촉됨.
베트남의 레당환교수가 베트남작가협회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쓰기와 읽기』가 기획한 ‘세계의 유명 인물’ 특집에 봄호와 여름호에 걸쳐 고은에 대해 글을 씀.
중국 북경 소재 명문 출판사인 ‘작가출판사’가 7권의 『고은문집』 을 기획, 2022년도 출간 예정으로 번역 진행.
제 31회 콜럼비아 메데힌 국제시축제에 초청받아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개막식에서 시낭송. 또한 별도의 단독 시낭송회도 가짐.
슬로베니아의 국제시축제인 ‘시와 포도주가 있는 날들’이 25주년을 기념해 기획한 온라인 행사 ‘빛의 공유’에서 시 낭송.
베를린문학제가 기획한 ‘팬데믹 사망자’를 위한 온라인 추도시 낭송회에 참석.
제 15회 베네주엘라 국제시축제에 초대받아 시낭송.

일찍이 1991년 시집 《해금강》을 내면서 고은은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죽고 나서 몇 년 뒤 누군가가 내 무덤을 파헤쳐본다면 거기에도 내 뼈 대신 내가 그 무덤의 어둠 속에서 쓴 시로 꽉 차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내가 살지 않는 미래까지도 내 시의 현재이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너무 시에 집착하나? 하기야 시와의 결별 바로 옆에서 내 시는 실재하기 때문에 내 집착은 그것으로부터의 해탈에도 속한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2002년 고은의 70세를 기념해 창비사에서 펴낸 시선집《어느 바람》에서 시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왜 시를 쓰느냐고 묻는다면 아직도 그 대답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까지 오는 길 44년을 나는 어설픈 농부였고 새였고 울음인가 하였다. 그러는 동안 말이 종교였다. 시가 오지 않으면 흙을 팠다. 흙 속에 시의 넋이 더러 묻혀 있다가 내 몸에 떨며 들어왔다. 바람 부는 날 잔터럭이 일어나며 나는 이내 가지 끝을 차고 날아올랐다. 공중에 시가 여럿이 떠 있었다. 스치다가 한 둘은 우연히 쪼아 먹었다. 자주 미쳤다. 운다. 울 음이나 졸졸 가는 도랑물이나 강물 그리고 천년 절벽 때리는 파도기둥이나 다 한 집안이다. 흰 포말의 춤, 시가 거기에 함께 있더라. 세상을 좀 넓히련다. 훨훨! 이승에만 갇혀 있지 않으련다.

다시 10년 후, 80세를 맞이해 70세 기념 시선집 『어떤 바람』을 대폭 증보한 시선집 『마치 잔칫날처럼』의 서문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갇히지 않으려고 버둥치지 않아도 가둔 힘이 운명 안에 고여 있는 자유에 의해 스스로 풀어지면서 기율을 버리거나 기율이 시를 흘끔흘끔 뒤따르거나 하는 해방의 풍모를 그동안 지녀주었다. 시는 밤바다와 달 사이의 요염한 우주 인연을 지우기도 하고 되받아오기도 했다. 나의 시 말이다. 앞으로 어이 될지 모르겠는데 이 미혹은 어떤 깨달음도 사절하며 남아 있는 풀더미 속을 들어선다. 언제까지나 귀향의 답은 없다. 도상(途上)일 것이다.

2013년 무려 607편의 시를 1013쪽에 담아 출간한 『무제시편』의 서문에서 그는 말하고 있다.

옛 시에서는 ‘곳(處)’이 ‘때(時)이다. 이 말이 후대의 내 말인 줄 누가 알았으랴. 나에게 시의 ‘때’가 곧 ‘시’인 것.
이것은 베네찌아에서 보낸 내 80세 절반에 걸쳐 나와버린 것들이다. 시의 유성우(流星雨)가 밤낮을 모르고 퍼부어내렸다. 이런 내 시의 행위는 어쩌면 한반도 일대의 빈약한 고대 시가에 대한 후대의 벌충일지 모른다는 것, 듬성듬성한 근대시에의 혈연적인 보강인지 모른다는 것에 어느 만 큼 연유할 것이다. 나 자신이 나 이전이기 때문이고 나 이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2016년 가을에 출간한 시집 『초혼』의 ‘시인의 말’은 다음과 같다.

지난 날로는 충분하다는 감회는 어이없다.
이백여년 전의 사나이가 시시한 듯이 노래한 적이 있다
발로 글을 쓴다고.
그래서인가 나도 가끔은 들판, 가끔은 종이 위를 돌아다니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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